몇 년 전 영국 무역청 자문단체인 한국진출 영국기업협의회가 자국에 배포한 ‘한국인 공략법’이 신문에 실린 적이 있다. 영국기업들이 한국 진출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체득한 내용으로 이런 대목이 있다. “한국인을 상대하는 데 있어 합리적인 논리보다는 감정적인 고려가 훨씬 중요하다. 한국인들은 기분에 좌우되는 극히 민감한 사람들로 기분과 감정상태가 빚어내는 결과는 상상 이상으로 크다. 절대로 한국인을 궁지에 몰아넣지 말고 치켜세워 유리한 결과를 돌출하라.”

한국인들이 매우 직선적이고 격정적인 감정에 쉽게 사로잡힌다는 얘기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우리 민족은 감정에 약하다. 흥분하기도 잘하고 눈물 흘리기도 잘한다. 이것을 감정이 풍부하고 정이 많기 때문이라고 풀이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감정에 약하다는 것과 감정이 풍부하다는 말은 다르다. 또 감정이 풍부하다는 것과 정이 많다는 것도 다르다. 정이 많다는 것도 눈물이 많다는 것과는 다르다.

하와이 망명길에 오르는 이승만 대통령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린 것은 바로 전날까지도 그의 하야를 외친 국민들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국상 때 땅을 치며 통곡한 것은 피격 전날까지 독재자 타도를 부르짖은 국민들이었다. 수의를 입은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의 아들 모습들을 보면서 현직 대통령의 마음이 얼마나 쓰라렸겠는가를 헤아린 것도 국민들이었다.

한국인의 이런 감정은 이번 노무현 대통령의 국민장을 통해서도 극명하게 드러났다. 장례기간을 거치면서 추모 열기는 요원의 불길처럼 번졌고 노 전 대통령은 피의자에서 ‘순국선열’로 부각됐다. 한국인이 쉽게 감정에 사로잡히는 민족이 아니라면 가능했을까. 전직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게 충격적인 사실인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때문에 고인의 공적을 재조명하거나 ‘표적수사’에 대한 공방은 제기될 수도 있는 문제다. 그러나 대통령까지 지낸 분의 극단적인 선택 자체를 미화하는 것은 곤란하다. 자살을 미화하는 것은 사무라이문화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다.

필자는 최근 한국 방문 중에 노 전 대통령 투신뉴스를 접했다. 사건 당일 적지 않은 신문들이 호외를 뿌렸는데 그의 죽음을 자살로 표현한 신문도 몇 개 됐다. 하지만 바로 다음날부터 자살이란 단어는 약속이나 한 듯 지면에서 사라졌고 ‘서거’로 물결을 이뤘다. ‘서거’로 애도 표시를 하지 않으면 ‘역사의 죄인’처럼 매도될 것 같은 사회분위기와 여론에 편승, 보수신문들이 꼬리를 내린 것이다.

언론이 여론을 정제하기는커녕 되레 부채질할 때 여론은 ‘냄비여론’이 되기 쉽다. 언론이 스스로 경계해야 하는 것은 여론에 영합하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다수결이라고 해서 목소리의 크기가 곧 여론의 척도일 수는 없다. 민심은 더더욱 아니다. “다수는 나쁘다는 말도 있고 소수는 항상 옳다”는 말도 있다. 한국언론 폐단의 하나는 소수의견인 작은 목소리는 반동분자이기나 한 것처럼 묵살해버리는 데 있다. 여론은 다수의견만으로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국민 주권의 민주국가에서 대권이니 통치권이니 하는 단어 사용은 삼가야 한다. 전제군주제 국가의 유물이기 때문이다. 국왕이 신하와 백성을 다스리는 근거가 이른바 대권이요 통치권이다. 서거라는 말도 그렇다. 통치권자의 죽음을 높이는 말로 민주국가에서는 고어사전 속에나 묶어두어야 할 단어다. 대통령의 법적 지위는 나라의 공복(公僕) 중 우두머리일 뿐이다. ‘대표 심부름꾼’을 제왕처럼 모시는 것은 백성의 도리이지 국민의 도리가 아니다. 노 전 대통령을 폄훼하려는 게 아니다. 앞으로 어느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도 그런 용어를 써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다. 대통령을 제왕처럼 모시고 대통령이 제왕처럼 군림하는 한 청와대의 비극은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이 대통령이다. 바로 노 전 대통령의 말이다.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