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의 달력은 8월이 정월이다. 새로운 시작의 달이다. 광복의 8·15와 건국의 8·15가 있다. 8월에는 환희와 감격의 날 뿐인가. 참담하도록 부끄러운 국치일(國恥日)도 있다.
사람이란 기억을 먹고 산다. 좋은 일과 자랑스런 일은 자꾸만 떠올린다. 하지만 불행하고 어두웠던 과거는 잊고 싶어한다. 그래서 국치일은 광복의 노래와 태극기의 물결에 묻혀버린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국치일은 광복절만큼이나 기억해야할 날이다. 일본을 이긴 연합국이라는 ‘남’이 안겨준 광복보다 한국민이 지키지 못 해 나라를 빼앗긴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99년 전 참담했던 시절로 되돌아가보자.
1910년 8월22일 오후 1시 창덕궁에서 어전회의가 열렸다. 순종의 마지막 어전회의다. 한참동안 침묵이 흐른 다음 순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조칙을 읽었다. “짐은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기 위해 한일 양국이 친밀한 관계로써 서로 합하여 일가가 됨은 서로 만세의 행복을 도모하는 소이로 생각하고 이에 한국의 통치를 통틀어 짐이 매우 신뢰하는 대일본국 황제폐하에게 양도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어 순종은 전권을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일임할 테니 데라우치 통감을 만나도록 하라고 일렀다. 그러는 동안 대신들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궁중에서 물러난 이완용은 오후 4시 데라우치 통감을 만나 다음과 같은 조약문서에 조인했다. ‘제1조,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정부에 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 그리고 영구히 일본국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에 게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또 전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을 승낙한다...’. 대한제국은 이렇게 어이없이 무너졌다.
나라가 완전히 결딴나는 순간 순종과 태황제인 고종 및 대신들은 무엇을 했는가. 합병에 따르는 왕실의 예우문제와 친일 고관대작들의 처우에 대해 일본 측과 흥정을 했을 뿐이다. 나라와 백성들의 운명을 걱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한제국이 사라진다고 공표된 날 백성들은 무엇을 했는가. 종로의 상인들은 보통 날과 다름없이 문을 열고 장사하고 있었다. 지방의 농부들은 여느 때와 같이 농사일에 여념 없었다.
한국인들은 망국의 책임이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 5적에게만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매국의 5적이 없었다면 대한제국은 건재했을까. 나라가 망하는데도 자신의 예우문제에나 관심을 가진 임금과 대신들, 나라의 흥망보다는 자신의 비즈니스에만 관심을 가진 백성은 망국의 책임이 없는가. 대한제국이 망한 것은 5적이나 친일파 때문만이 아니라 당시 권력층과 다수 백성들에게도 공동책임이 있는 것이다. 김구 선생은 “당시 국내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친일파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한국이 망국의 설움을 딛고 1세기 만에 세계 대국의 반열을 꿈꾼다. 여러 산업분야에서 일본을 추월했다. 선진국들이 한국을 보는 눈도 예전과 다르다. 세계 초강국인 미국대통령까지 코리아 예찬론을 편다. 해외한인의 입장에서도 조국이 자랑스럽다. 한국인임을 내세우고 싶다. 하지만 큰 나라가 되자면 큰 국민이 돼야 한다. 1등 국가는 경제력을 기반으로 한 품격 높은 국가를 말한다. 국가의 품격은 곧 국민의 품격이다. 한국민의 품격은 1세기 전에 비해 얼마나 높아졌는가. 키만 커지고 정신은 제자리를 맴도는 게 아닌가.
국치일을 예로 보자. 해마다 광복절이 다가오면 친일 청산을 부르짖고 일본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그러나 왜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는지에 대한 자성의 소리는 별로 없다. 자기 비판력이야말로 선진국의 잣대다. 비판력의 결여는 사회의 미성숙을 뜻한다. 대한제국이 망한 것은 일본 탓도 있지만 ‘우리 탓’도 있다. 통치자의 리더십도 없고 국민의식도 없는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다.
언제까지 일본 탓만 할 것인가. 삼성이 소니를 이긴 건 일본기업의 강점을 철저히 모방한 덕이다. 일본이라는 탯줄 없이 오늘의 삼성은 없다. 현대나 포항제철도 마찬가지다. 결국 오늘의 한국경제력은 ‘일본 탓’이 아니라 ‘일본 이해’의 덕이다. 경제만이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지일파와 친일파가 많아져야 한국이 명실 공히 1등 국가가 될 것이라고 본다.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