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결식을 전후해 한국언론에 가장 많이 등장한 말 중에 하나가 지역주의다. “이제야말로 지역과 이념을 넘어 새로운 국민통합의 시대를 열 때”라는 말은 한국사회의 화두로 여겨질 정도다. 김 전 대통령 생전에 동서대결 구도가 어느 때보다 심화했고 그가 지역주의 ‘피해자’라는 인식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지역주의가 과거에 비해 많이 누그러들었지만 아직도 한국사회에서 ‘태풍의 눈’이란 사실을 다시 입증한 셈이다. 해외한인사회도 마찬가지다.

과연 지역주의는 한국사회 최대의 고질병인가. 좀 극단적인 사례지만 스위스를 보자. 스위스에는 독일계와 프랑스계, 이탈리아계 등 혈통이 전혀 다른 국민들이 섞여 산다. 이들은 언어도 다르다. 알프스의 골짜기를 경계로 나름의 정체성을 형성한 도시와 마을이 골짜기만큼이나 많다. 또한 그곳 주민들은 저마다 우리 고장이 최고라는 자부심과 이웃마을에 대한 강력한 경쟁의식을 지니고 있다. 한국적으로 생각하면 대통령선거 때마다 자기 고장사람을 뽑으려고 난리칠 법도 하다. 그런데 난리나 대결은커녕 관심도 없다. 대통령이 실권 없는 명목상의 자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7명이 매년 돌아가며 맡는 관계로 국민들은 대통령 이름도 모른다. 이런 대통령을 하려고 어느 정치인이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소리를 하겠는가.

한국을 스위스와 비교하는 자체가 무리다. 권력구조가 다르고 국민의식도 다르다. 하지만 대선만을 놓고 본다면 비교대상이 될 수도 있다. 만약 스위스대통령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자리였다면 국민들이 선거 때 무관심으로 일관했을까. 역으로 한국대통령이 별 볼일 없는 자리라면 한국인이 선거철마다 열병을 앓았을까. 한국의 지역주의는 ‘쪼개지고 편가르기를 좋아하는’ 국민성 때문이 아니라 정치인들이 정략적으로 만들어낸 허상(虛像)이라는 점을 얘기하려는 것이다. 지역주의 중심에는 대선이 자리잡고 있다. 대선열기가 줄어들수록 지역주의는 완화된다. 대선열기를 줄이는 첩경은 대통령권력의 분산이다. 어느 지역 출신이 대통령이 되든 내가 사는 문제와는 별 관계가 없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지역주의가 설 땅은 좁아진다. 지금 같은 제왕적 대통령제를 고수하면서 “지역을 넘어 통합의 새 시대를 열자”고 호소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역주의는 국민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시스템의 문제다.

지역주의의 또 하나 허실은 망국론이다. 만약 망국병이 맞다면 한국은 벌써 나라 간판을 내렸어야 한다. 30년 이상 중병을 앓았는데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한국은 힘겹게 살아남은 게 아니라 힘차게 치솟고 있다. 생각보다도 너무 잘 나가 한국인 스스로도 놀랄 지경이다. 어디에도 망국의 조짐은 찾아볼 수 없다. 오랫동안 우려했던 ‘지역주의=망국병’ 등식은 과장된 기우였던 게 확실히 드러났다.

지역정서, 지역감정은 사실 그리 나쁜 게 아니다.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긍정적인 면도 적지 않다. 사람이라면 성인이 아닌 다음에야 누구나 자기 집을 먼저 생각하게 마련이다. 다음은 동네, 도시, 나라 순으로 애착을 갖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지역주의가 없어져야 나라가 더 빨리 발전하고 국민대통합이 이뤄진다는 말은 이상론일 뿐이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한국의 지역주의는 그렇게 우려할 수준은 아니다. 캐나다의 영국-프랑스계 갈등, 프랑스의 남북대립 및 수도인 파리와 지방의 반목에서 보듯 지역주의는 한국의 전매품이 아니다. 오랫동안 작은 지역으로 나뉘어 봉건영주에 의해 통치된 일본의 지역주의는 한국보다 더 심하다. 중국은 국토면적도 크고 말과 민족마저 다르지만 지역주의를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감정이란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악화하는 반면 가만 놔두면 저절로 풀어지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지역주의 망국론은 정치인들이 정략적으로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다. 배타적인 지역주의가 있다면 반드시 풀어야겠지만 지역주의 자체를 죄악시하는 분위기도 없어져야 한다. 또 지역주의문제의 해결은 역설적으로 이를 문제시하지 않은 데서 찾아야 한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과 지역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민주사회의 기본이기도 하다.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