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선수의 올림픽 쇼트트랙경기를 보면 가히 환상적이다. 초반엔 꼴찌로 달리다가 종반에는 여지없이 선두로 치고 올라가 경기를 역전시킨다. 파고들어갈 자리가 없는데도 빈틈을 찾아 끼어드는 모습은 예술의 경지다. 비결이 무엇인가. 이정수가 금메달을 따내자 AFP통신은 “지독한 훈련량 덕분”이라고 보도했다. 맞는 얘기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세계 최강인 중국은 훈련을 독하게 하지 않아 늘 한국에 당했는가. 지옥훈련 외에 플러스알파가 있다는 소리다.

한국 쇼트트랙은 왜 강한가. 최근 4차례 올림픽을 보면 스케이팅 기술을 바탕으로 빼어난 전략 및 전술과 대회마다 신기술을 만들어내는 창의성 덕분이다. 4년 전 토리노대회 남녀 계주에서 한국은 ‘상대 약점을 공략하라’는 손자병법을 동원해 쇼트트랙왕국의 면모를 지켰다. 4명이 번갈아 뛰는 계주에서 4번 주자는 가장 속도가 떨어지는 선수가 뛰는 게 상식이다. 하지만 한국은 에이스급인 이호석과 변천사를 4번에 배치, 중국과 캐나다의 허를 찔렀다. 변천사는 여자 3천m 결승의 결정적인 고비에서 2차례나 선두를 탈환해 금메달의 일등공신이 됐다. 남자 5천m 결승에서도 이호석이 선두를 뺏으면 송석우, 안현수가 이를 지키는 작전을 썼다.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에서는 ‘교대’ 묘수로 세계 최강 중국을 눌렀다. 중국이 선수를 교대할 때 한국선수는 교대 없이 반 바퀴를 더 달려 선두를 뺏는다는 것이다. 계주에서는 통상 1.5바퀴를 돈다. 올림픽을 앞두고 2바퀴를 질주하는 연습을 수없이 해온 주민진이 이 작전으로 선두를 뺏었다. 실력은 뒤졌지만 머리싸움에서 이긴 것이다. 한 수 위의 실력을 자랑하던 중국은 금메달을 놓친 후 경악했다.

98년 나가노대회에서 한국은 ‘전매특허’ 발 내밀기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남자 1천m 결승이 끝나자 중국의 리지아준은 자신이 우승한 줄 알고 환호했다. 하지만 '금‘은 김동성이 차지했다. 스케이트 날을 쭉 내미는 묘수로 리지아준보다 0.053초 빨리 결승선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전이경도 발 내밀기로 0.57초 차이로 중국선수를 제치고 우승했다.

94년 릴레함메르대회 당시 세계 최강은 단연 중국이었다. 올림픽이 열리기 전 상대 약점을 찾기 시작한 한국은 중국선수들이 코너를 돌 때 안쪽에 공간이 생긴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때부터 김기훈, 채지훈, 전이경 등은 코너에서 상대 안쪽을 파고드는 연습을 집중적으로 했다. 한국 팀은 중국에 비해 실력이 떨어졌지만 인코스 돌파라는 신기술로 금맥을 찾았다.

심청전에는 심봉사가 갑자기 눈이 뜨여지면서 딸 심청이를 볼 수 있게 되자 “아니 이게 꿈이냐 생시냐”하면서 자기무릎까지 꼬집어가며 믿기지 않는 현실을 확인하는 장면이 있다. 요즘 밴쿠버올림픽을 지켜보는 한국인들이 그런 심정이 아닌가 싶다. 육상으로 치면 100m인 스피드스케이팅 500m에서 한국남녀가 나란히 금메달을 따내자 꿈이냐 생시냐 하는 식의 의아심 섞인 감탄사를 연발한다. 하기야 선수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가 아닌가. 여기에 이승훈의 스피드스케이팅 1만m 우승과 김연아의 쇼트프로그램 1위 드라마가 더해지면 앉아서 무릎을 꼬집다가 벌떡 일어서게 선다. 이번에는 “야, 이거 한국인 맞아?”하고 놀라게 된다.

모태범·이상화·이승훈의 월계관은 하계올림픽 육상에서 남녀 100m 달리기와 남자마라톤 제패에 비견될 만한 쾌거다. 그런 기적의 씨를 뿌린 것은 쇼트트랙이라고 본다. 변화무쌍한 쇼트트랙의 전략과 강점을 스피드스케이팅에 이식한 후 과학의 거름을 주어 불가능하게 보였던 겨울의 에베레스트를 단숨에 정복한 것이다.

쇼트트랙 승리의 역사가 롱트랙 승전보로 대역전되는 것을 보면서 한국인의 잠재능력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모르는 잠재능력을 갖고 있다. 평생 사는 동안 우리가 쓰쓰는 능력은 30%에 불과하다고 한다. 70%는 한 번 쓰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난다. ‘휴면계좌’에 있는 70% 중에 조금이라도 더 꺼내 쓴다면 넘지 못할 장벽이 없다는 것을 한국 빙상영웅들은 말해준다. 한국인이 이번 밴쿠버올림픽에서 받은 가장 큰 선물, 그것은 ‘자기발견’이다.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