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아 때문에 잠 못 이룬 교민이 한둘이겠는가.

우아한 몸짓, 곱상한 얼굴 어디에 활화산보다 더한 승부욕이 스며 있는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또다른 우승 후보 마오 아사다가 채 얼음판에 나오기도 전에 이미 판은 끝났다. 미국 NBC의 해설자들은 아예 “금메달 확정”이라 단정짓더니 흥분에 못이겨 “여왕폐하 만세!”라며 오버했다. 뒤는 더 이상 볼 것도 없다는 것.

김연아에 이어 나온 아사다는 결과를 예감한듯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모 아니면 도. 고난도 기술을 구사했으나 실수 연발. 이렇게 해서 김연아는 전설이 되었다. 반면에 라이벌 아사다 마오는 시상대에서조차 끝내 표정을 펴지 않았다. 인간의 승부세계에선 1등만 기록할 뿐 패자는 그 순간 잊혀지고 만다.

‘정글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정글에선 힘이 지배하고 힘만이 정의다. 수천만 년 수억 년 야생의 세계를 지배해온 불문율이다. 여기에 적응하면 이른바 적자생존(適者生存) 원칙에 따라 살아남고 벗어나면 도태(淘汰)라는 이름으로 사라진다.

야생의 세계가 그렇게 냉정하기만 할까?

탄자니아 세렝게티 평원에서 사자무리가 얼룩말 한 마리를 사냥하면 일단 힘센 놈이 우선권을 갖는다. 소유권이 아니라 단순히 식사순서일 뿐. 멀찌감치 개평꾼들이 차례를 기다린다. 집단 결속력이 강한 하이에나는 가까이에서, 힘없는 재칼은 좀 더 먼 곳에서 사자가족들 식사가 끝날 때까지 인내심을 발휘한다.

마지막엔 독수리 떼들이 몰려들어 뼈다귀에 묻은 살점 하나까지 깨끗하게 먹어 치운다. 그리하여 초원엔 정교한 균형이 유지된다. 그곳엔 필요 이상의 소유가 없다. 이게 바로 약육강식(弱肉强食)을 넘어선 공존(共存)이다. 적어도 인간이 만들어낸 신자유주의식 승자독식(勝者獨食)이 야생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인간의 세계는 잔인하다. 패자에게 돌아갈 몫은 없다. 김연아뿐 아니다. 요즘 밴쿠버에선 연일 영웅이 탄생한다. 코리언들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메달집계와 순위확인에 여념이 없다. 메달이라고 다 같은 메달이 아니다. 선수든 국민이든 금 아니면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누구를 탓하랴. ‘스포츠맨십’이라는 공허한 말로 마음의 여유를 강요하는 것은 현실을 모르는 일. 그들은 경험과 본능으로 안다. 한국에선 어떤 금메달 한 개라도 다른 색깔의 메달 10개보다 가치 있다는 것을.

지난여름 베이징올림픽 때 한 장면. 가장 유력한 금메달 후보인 한국의 왕기춘 선수는 73kg급 결승에서 아제르바이잔 선수에게 진 뒤 매트에서 통곡했다. 그는 시상대 위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고도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앞서 벌어졌던 65kg급 결승전. 한국의 최민호 선수에게 패한 체코 선수가 환한 웃음으로 승자의 손을 높이 들어주며 축하해줬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물론 패배는 쓰리다. 4년 동안 공든 탑이 단 한순간에 무너지는데 가슴 아프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아쉽다. 승자에게 웃음과 축하를 보내는 한국 선수들이 많지 않다.

지난 16일 이상화 선수가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500m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필자는 보았다. 동메달에 머문 중국의 왕베이싱 선수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이 선수를 꼭 껴안는 모습을.

승리가 좋다는 걸 누가 모르겠는가. 그러나 패자의 눈물을 기억하지 않는 사회는 너무 야박하다. 희망이 없다. 승자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받을 때 저 구석에서 가슴 움켜쥔 패자가 있다는 사실을 선수든 관객이든 잊지 말기를 기대해본다.

덧붙임. 그나마 한 가지 안도되는 것. 올림픽에서 옛날의 ‘한’스런 모습이 사라졌다. 신세대들은 금메달이 아니어도 당당하다. 의지는 굳되 비장감은 적다. 그 여유로운 모습에서 한국의 달라진 오늘을 새삼 느낀다.

라면 먹고 이 악물고 뛴 지난날이 서러워서, 또한 야채장수·생선장수로 근근히 뒷바라지하는는 부모 생각에 이기든 지든 경기 끝난 뒤 땅바닥에 엎어져 통곡함으로써, 온 국민을 울리던 그런 장면이 보이지 않은 것만도 얼마나 다행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