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6일 정오

세상 모든 일마다 어떻게 요리해서 신문에 실어볼까 이런 생각에만 골몰하니 직업치곤 참 얄궂다. 늘 그렇듯 그날도 여느 때처럼 오전 시간은 눈 깜짝할 새 흐르고 말았다.

정오 가까울 무렵 오늘도 특별한 일은 없구나 생각하며 사전에 준비했던 기획기사를 1면 톱(Top) 기사로 송고한 뒤 한숨 돌리고 있을 때였다. 가까운 지인이 찾아왔다. "어젯밤에 이런 일이 있었는데..."

첫마디를 듣는 순간 머리가 쭈뼛 곤두섰다. 애타게 기다리던 '1면톱' 꺼리가 드디어 나타났는데 반갑기보다는 덜컥 겁부터 났다. 사건이 너무 컸다. 실체를 제대로 전달하고 진실을 밝힐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마감 시각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늘은 심층보도보다 1보라도 먼저 내보내는 게 급해 기자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하고 번갯불에 콩을 튀었다.

이렇게 해서 17일자 1면에 '한인연루 대형 성범죄 충격'이라는 톱기사가 선을 보였다. 남자 교인 6명이 여자교인 4명에게 온갖 악행을 했다는 사건이었다. 신문을 만들면서도 내내 '집단생활'이라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사건이 일어난 교회의 젊은 남녀 교인 30여명이 아파트에서 '집단생활'을 해왔다는 것.

만약 이 사건이 조작됐고 가해자들이 누명을 썼다면?

2. 16일 밤

현장을 취재하던 정재호기자로부터 밤늦게 전화가 걸려왔다. "아까 하신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가해자로 몰린 사람들과 주변 지인들은 일관되게 그리고 아주 강력하게, 또한 이런 저런 정황 증거를 들며 결백과 억울함을 주장했다.

사건 개요를 대충 머릿속에 정리했다. 더 늦은밤 안주영변호사에게 전화했다. 깜짝 놀라며 "아니 어떻게 알았어요?" "다 아는 수가 있어요" 안변호사는 깔깔 웃더니 이내 정색하며 말했다. 형사사건을 12년 동안 다뤄봤지만 이같은 조작사건은 처음이라며 변호사 이전에 인간으로서 분노가 앞선다고 했다. 그는 변호사와 언론인이 힘 합해 진실을 밝히자고 말했다.

다시 그밤 총영사관 진정무영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재외국민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 진영사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건 자체가 워낙 방대하고 엽기적이어서 굉장히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관련자들이 힘합해 진실을 밝혀내야 한다고 적극 강조했다. 내일 신문은 가해자로 몰린 사람들 주장을 적극 반영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런데 만약 사건이 조작되지 않았고 가해혐의자들이 진짜 범인이라면?

3. 진실을 향해서

"우린 결백...너무 억울하다" 1면 머리제목 치곤 투박했지만 더 이상은 생각할 수 없었다. 대문짝만하게 신문지면 6단 전체를 관통하는 제목이었다. 많은 분들이 격려했다. 18일 아침엔 독자로부터 빵 한상자가 배달되기도 했다. 속속 제보가 들어왔다. 대부분 우리가 생각했던 바로 그 내용이었다.

부지런하고 악착같은 정기자는 교회로, 아파트로, 하숙집으로 밤낮 가리지 않고 뛰었다.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표정은 밝았다. 필자 역시 힘들었다. 아직 진실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곳을 향해 한발 한발 다가간다는 게 얼마나 보람있는 일인가.

18일 저녁. 이날 따라 별다른 일 없이 미적미적 퇴근을 미루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송재갑목사였다. 반가웠다. 해당교회의 중심인물이기에 수십차례 통화를 시도했지만 연결되지 않아 애태우던 참이었다. 그는 예상대로 두 가지를 주장했다. “자신은 이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다. 가해자들이 죄를 저질렀다.”

19일 보석 청문회가 분수령이었다. 보통 사건의 경우 보석 여부는 간단한 청문회 한번이면 끝난다. 그러나 사건이 사건인지라 17일 이미 7시간 30분에 걸친 치열한 공방에도 결론이 나지 않았고 19일 최종결정이 내려졌다. 결과는 보석 허가. 모두 풀려났다.

3명의 석방은 끝이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추가고소, 또 결백 주장...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다.

캐나다와 한인사회, 그리고 모국을 떠들썩하게 하는 이번 사건의 진실은?

4. 프로페셔널다운

국내외 언론들

18일 토론토시경은 이번 사건에 대한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피해자의 주장만 그대로 국내외에 전해졌다. 67개 죄목이 이들에게 씌워졌다. 현지 언론들이 발칵 뒤집어졌다. 이미 한국 언론들은 본보를 인용해 사건에 대해 대대적인 보도를 해오고 있었다.

캐나다와 한국 언론들은 이번 사건을 접하면서 교회를 둘러싼 이상한 행태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최초 보도를 하고 가장 많은 정보를 확보하고 있다는 게 알려지자 국내외 언론들이 한국일보로 몰려들었다.

본보 취재팀에 인터뷰 요청이 빗발쳤다. 기자가 기자를 대상으로 취재하는 보기 드문 광경이 연출됐다. 다행이었다. 가해 혐의자 6명의 일방적인 흉악범죄 사건으로만 알려지다가 “이들이 결백할 수도 있다, 모교회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심층보도해야 진실에 접근할 수있을 것 같다”라는 공감대가 형성되는 순간이었다.

심지어 캐나다 현지 언론인들은 본보 기자들과의 개인적인 인연까지 활용해 밤늦게까지 본보 취재팀 집에 전화를 하는 등 취재경쟁을 벌였다. 그 기자들의 프로페셔널다운 모습에 동업자로서 고개가 숙여질 정도였다. 한국 방송의 젊은 PD는 밤잠 자지 못하고 수시로 연락을 하면서 사건실체에 접근하려 했다. 그는 또 캐나다 현지를 방문해 심층보도 프로그램을 만들어 진실을 밝히고 싶다고 했다.

모두 귀중하고도 존경할만한 언론, 언론인들이다.


5. 열등감에 찌든 어느 신문

“...토론토 한인교회 신도들 사이에서 발생한 집단성폭행 주장 사건이 한국 및 캐나다 주류언론에 잇달아 보도되면서 토론토 한인사회 전체의 이미지가 크게 실추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이 사건이 수일 전 토론토 교민언론에 등장하면서 한국 언론들이 일제히 큰 관심을 갖고 잇달아 보도한데 이어, 마침내 캐나다 주류언론들도 한인혐의자들의 사진까지 게재하면서 본격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중략) 특히 일부 동포들은 이런 수치스럽고 불미스런 일을 한인언론이 앞장서 연일 대서특필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는 의견들을 피력하고 있다. (중략) 무슨 좋은 일이라고 한인언론이 앞장서 연일 대서특필을 하는지 모르겠다...”

놀라지 마시라. 다른 곳도 아닌 바로 이곳 토론토에서 나오는 '일간신문' 중앙일보 22일(월)일자 1면 톱기사다. 컴플렉스가 이 정도라면 이건 병이다. 같은 교민언론으로 치부될까봐 부끄럽고 두렵다.

올해 들어 벌써 몇번째 트집잡기인지 모른다. 본보는 그동안 저급한 장사수법에 일일이 대꾸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한 가지만 권하고 싶다. 시비를 걸어도 글 실력좀 길러서 했으면 좋겠다. 아니면 더 나은 기사로 승부를 하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