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인류문화 중에서 가장 핵심이다. 존재의 의미와 지향해야 할 가치를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특히 갈수록 물질주의로 변하는 세상에서 종교는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폐해를 비판한 이들도 더러 있다. 대표적인 케이스로 종교를 심리학적 측면에서 비판한 마르크스와 프로이드를 들 수 있다.

마르크스는 ‘종교는 아편’이라고 규탄했다. 인간 고통을 심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낸 종교가 해결은커녕 인간을 비현실적이고 도피적으로 만듦으로써 실제로는 더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것이다. 아편이 일시적으로 고통을 잊게 해주지만 결국은 더욱 악화시키듯 종교도 고통과 불행의 근원을 없애는 대신 더욱 심화시킨다는 주장이다.

프로이드는 마르크스보다 한 발 더 나아갔다. 종교란 심리적 만족을 위해 인간이 꾸며낸 환상적 얘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여러 종교들이 강조하는 진리가 자동적으로 부정되지는 못 한다. 초자연적인 힘에 대한 믿음과 그에 의지해 삶을 살아가려는 인간의 소망은 영구불변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마르크스나 프로이드 등이 주장하는 종교의 부정적 요소가 사이비종교 또는 사교(邪敎)에 의해 교세 확장의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 집단은 종교의 아편적 요소와 환상적 요소를 최대한 왜곡해 사람들을 유인한다. 일례로 지난 93년 86명의 신도가 떼죽음 당한 미국 사교집단 다윗교를 보면 교주 데이빗 코레시는 중학교 중퇴자로 당시 33세의 젊은이였다. 그는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학업을 중단했지만 성서지식만큼은 박사 이상이었다. 언변도 뛰어나 누구든 그의 설교를 들으면 쉽게 넘어갔다.

그의 교세 확장비결은 종말론이었다. 자신이 하나님의 7번째 마지막 천사이며 인류 최후의 전쟁 아마겟돈에 대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다윗왕처럼 여러 아내를 거느려야 한다며 연령을 불문하고 숱한 여성들을 성폭행했고 재산헌납을 강요했다. 그의 종말론에 한 번 넘어가면 누구라도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는 마력을 지녔다. 논리적 설득력 때문이 아니었다. 종말론에 대한 불안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데다 그 불안감이 심하면 심할수록 종말론에 쉽사리 빠져든다는 점을 코레시는 간파했기 때문이다.

사이비종교에서 종말론과 쌍벽을 이루는 게 영생론이다. 영생론 역시 사람들의 불안심리를 노린다.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식의 성서 외적인 영생론은 불안한 현대인에게 환상의 묘약처럼 작용할 수 있다. 사이비의 영생론이 “죽어도 천국에서 환생해 영원토록 살 수 있다”는 성서적 가르침과 다른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종말론이나 영생론을 내세워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사이비종교야말로 ‘아편’과 ‘환상’을 가장 효과적으로 악용하는 집단이다.

사이비종교사건이 터질 때마다 많은 이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똑똑한’ 젊은이들이 예상외로 많이 포섭됐다는 점이다. 그들은 몽매무지한 사람들이 아니다. 배운 게 많고 물질 또한 아쉽지 않은 젊은이들이다. 그런데도 어떻게 짝퉁종교에 빠졌을까. 사이비가 노리는 게 무엇인가를 알면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사이비종교와 전쟁을 치르다 94년 테러로 목숨을 잃은 탁명환씨에 따르면 한국의 신흥종교 수는 350여 개, 신도 수는 200만 명에 달하는데 그 중 20%가 사이비성격을 띠고 있다. 그는 “신흥종교 자체를 좋다 나쁘다로 구분하긴 곤란하다. 다만 개인과 사회적 질서를 부정·파괴하는 종교적 사이비성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종교는 당연히 아편이 아니라 누룩이어야 한다. 아편으로 변질되고 있다면 그건 종교가 아니다. 성서의 귀중한 진리를 임의로 해석하는 집단이라면 아무리 성서지식이 많더라도 기독교의 가면을 쓴 것에 불과하다. 공자의 문장을 마음대로 해석하라고 한다면 그것이 진리의 자세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순진한 일부 대중의 맹신적인 행위다.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적어도 믿음의 근거를 갖고 신앙인이 돼야 하지 않을까.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