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정심안(言正心安)이란 말이 있다. 말을 바르게 하는 것이 마음의 평안을 가져온다는 뜻이다. 기자 입장에서 보면 글을 바르게 써야 마음이 평안해진다는 말이다. 그보다는 사회의 평안을 위해서도 글은 바로 써야만 한다. 글을 바로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정확한 사실보도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기자라면, 심지어 견습기자라도 사실보도에 충실하려고 애를 쓴다. 의사가 환자의 병을 고치려고 노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은 능력과 자질을 떠나 기본이다. 그런데 그 기본을 지키기가 말처럼 쉽지 않다. “기자는 사실보도만으로도 자주 사람을 다치게 하기 때문”이다. 4년 전 작고한 미국의 유명언론인 A.M. 로젠탈의 말이다. 공정보도를 강조하기 위해 60년 기자생활에서 얻은 교훈을 전한 것이다.
로젠탈은 뉴욕타임스 편집국장시절 기자들에게 일단 기사를 쓴 뒤 기사에 나오는 이름을 자신의 것으로 바꿔놓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고 충고하곤 했다. 그 사람이 나라면 이런 기사가 나갔을 때 어떤 고통을 받게 될지를 곰곰이 따져보라는 것이다.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신중을 가하라는 주문이다.
여느 신문사와 마찬가지로 한국일보에도 기사와 관련해 전화가 많이 온다. 최근에는 특히 실협기사로 항의 내지는 분통을 터트리는 분들도 있다. 본보가 중립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고, 이젠 실협 소리만 들어도 지겨우니 그만 쓰라고 말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이런 질책이나 당부는 단체가 내분을 겪을 때마다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그분들의 전화를 받은 후 문제의 기사를 다시 보면 신문사 입장에서는 ‘사실 그대로’ 보도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쪽저쪽에서 이의 내지는 불만을 제기하는 것이다. 특히 인터넷 게시판을 보면 도가 지나칠 정도로 본보 보도에 비난의 화살을 날리는 네티즌들도 있다. 남북관계나 이념과 관련된 보도라면 더욱 심하다. 신문사 입장에서는 항의든 성토든 감사한 일이다. 그만큼 신문에 관심과 애정이 많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그때마다 “사실보도만으로도 자주 사람을 다치게 한다”는 교훈을 떠올리게 된다.
신문의 중립성이란 무엇인가. 한 쪽의 잘못을 한 가지 쓰면 다른 쪽 잘못도 똑같이 하나만 쓰는 게 아니다. 이쪽 말 반영하고 저쪽 말도 똑같이 반영해야 불편부당성이 지켜지는 것도 아니다. 신문은 어디까지나 독자 알권리에 최우선을 둔다. 그것이 특정인이나 단체에 이로우냐 아니냐는 것은 2차적인 문제다. 즉 신문은 어디까지나 독자와 일반한인 편에 선다는 것이다. 어느 개인이나 단체 편에 서는 게 아니다.
한 쪽의 과오나 부정을 보도하면 그것이 간접적으로 경쟁자 측을 유리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리하여 본의 아닌 오해를 살 수 있다고 판단해 당연히 써야 할 기사를 삼간다면 그것은 언론 본연의 자세에서 벗어나는 것이 된다. 기자는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는 직업이지 ‘현명하냐 어리석으냐’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직업이 아니다. 세일즈맨과는 다르다. 그래서 언론의 자유는 헌법에까지 보장돼 있는 것이다.
신문의 자유만을 강조하려는 게 아니다. 언론이란 제도화된 언론기관의 전유물이 아니다. 말이나 글로써 표현되는 개개인의 모든 의견도 다 언론이다. 언론자유란 신문이나 방송의 자유일 뿐 아니라 모든 입의 자유다. 어떤 종류의 언론도 아무 저해를 받지 않고 유통되는 자유시장이 진정한 자유언론의 사회다.
인터넷에 있는 네티즌들의 의견도 언론이다. 누구의 간섭이나 압력을 받지 않고 글을 올릴 자유가 있다. 자유 있는 곳에 책임도 있다. 그래도 언론이라면 글은 바로 써야 하며 내 글로 다른 사람이 다치지 않을까도 생각해야 한다. 비난이 아닌 비판을 해야 한다. 그런 생각 없이 자유만을 염두에 둔다면 언론의 포기다.
언론의 화살이 남을 향할 때는 그 언론론이 사명을 다하고 있다고 여기고 나를 향할 때는 아무리 그것이 정당한 것이라도 왜곡이라 여긴다면 이때 언론의 공정성을 침해하고 있는 것은 언론자신이 아니다. ‘모든 언론’이 함께 생각해볼 부분이다.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