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공영방송 BBC는 2006 월드컵 당시 “한국에서 축구는 오직 대표팀으로 시작해 대표팀으로 끝난다”고 보도한 적이 있다.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명문팀 하나 없이 의욕만 갖고 세계무대에 도전장을 던지는 나라라는 뉘앙스가 풍기는 말이다. 해가 지지 않는 축구제국의 시각에서 보면 그럴 수도 있다. EPL(잉글랜드 프레미어리그)에만 20개 팀이 있는데 국제적 명성도나 실력에 있어 하나같이 한국대표팀을 압도한다. EPL의 숱한 스타들 중에서 수퍼스타들만 뽑은 게 이번 남아공월드컵에 출전한 영국대표팀이다.
그런 스타군단이 1승2무로 힘겹게 16강에 올랐다. ‘의욕만 앞세운 무모한’ 한국팀은 축구제국보다 한 발 앞서 'G16' 대열에 진출했다. 그것도 안방도 아닌 해외에서. 놀라운 사건 아닌가. 세상을 놀라게 하고 무엇보다 우리 스스로를 놀라게 했다. 김연아, 모태범 등 한국 젊은이들이 밴쿠버동계올림픽에서 보여준 ‘불가능은 없다’ 드라마를 다시 보는 기분이다.
나이지리아전 이후 만난 한인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화사하다. 모처럼 하나가 되어 아낌없이 열광한 탓이지 엔도르핀이 넘치는 것 같다. 모국사회는 한걸음 더 나아가 ‘감격시대’의 컴백을 노래한다. 내친김에 우루과이도 접수하자고 흥분한다. 한국인의 가슴 속에서 또 다시 뜨거운 것이 용솟음친다. 국운상승의 기운이다.
월드컵에서 1승을 낚아 운 좋게 16강에 갔다고 국운 운운하는 건 과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국운상승도 따지고 보면 그리 별 게 아니다. 5천만 한민족의 가슴이 모두 뜨겁게 용솟음친다면 세상에 못 넘을 벽이 있을까. 그게 한 나라의 기운 상승 아닌가.
며칠 전 블룸버그 칼럼니스트 매튜 린은 “월드컵 우승국을 예상하고 투자해보자”는 이색제안을 했다. 주식에 투자하려면 보통 주가수익비율, 순자산가치 등 지표들을 매입기준으로 삼지만 월드컵 경기결과를 투자에 적용해보자는 것이다. 다소 엉뚱한 발상이지만 월드컵 승패가 해당국가의 분위기를 좌우한다는 데는 별 이론(異論)이 없을 듯싶다.
그는 스페인이 우승할 경우에는 유로화를 사라고 권했다. 사상 첫 월드컵 우승이라는 황홀감에 도취한 스페인국민들은 EU가 요구하는 재정긴축안을 수용, 유로화가 살아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브라질이 우승하면 브릭스에 투자하라고 말한다. 또 한 번의 우승에 들뜬 브라질국민들의 모습이 TV로 중계되면 국제투자자들은 누가 세계경제에서 떠오르는 파워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는 만약 기적이 일어나 미국이 우승하게 된다면 미국에서 인기 높은 야구·농구·미식축구와 관련된 자산을 팔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 축구수준이 크게 향상되면 미국은 더 이상 ‘자기만의 스포츠’가 필요 없게 된다는 얘기다. 경제전문가의 ‘축구예언’에 비중을 둘 필요는 없지만 월드컵 승리가 나라흐름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은 맞는 지적 같다.
월드컵으로 국운이 크게 상승한 대표적 실례는 독일이다. 서독은 1954년 스위스월드컵에서 당시 32승 무패를 자랑하던 세계 최강 헝가리에 3-2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며 우승했다. 패전의 잿더미 속에서 망치를 두드리던 서독국민들은 일거에 자신감을 회복, 라인강의 기적을 일궈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독일인 특유의 강인함이 바탕이 된 결과다.
74년 뮌헨월드컵 당시 서독은 오일파동이라는 어려운 경제여건을 뚫고 세계에서 가장 앞선 사회복지제도를 만들어냈다. 이탈리아월드컵을 제패했던 90년에는 40여 년의 분단역사를 종식시키고 통일을 이루는 역사적 쾌거를 이끌어냈다. 독일에서 월드컵은 단순한 스포츠행사가 아니다. 침체된 경제에 새바람을 불어넣는 계기로 작용했고 국민들에게 자신감을 되찾게 해주었다. 역사의 고비마다 월드컵이 국민들에게 용기를 주고 단결을 유도한 기폭제가 된 것이다.
한국은 독일과 닮은 점이 많다. ‘하면 된다’는 자신감으로 한강의 기적을 일궈냈다. 난지도의 쓰레기더미 위에 세운 월드컵경기장에서 4강신화를 창조했다. 그 꿈이 IT강국의 대로를 열어놓았다. 이제 남은 건 가슴 속에서 용솟음치는 에너지를 대통합정신으로 승화, 궁극적으로 통일의 길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것이 월드컵신화의 완성이 아닌가 싶다.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