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 얘기다.

 가뜩이나 복잡한 세상인데 또 무슨 골치 아픈 얘기냐며 손사래 치는 분들이 있을 듯싶다. 지레 짐작하지 마시라. 그다지 난해할 것도 없고 따분하지도 않다.   

 ‘공공재의 비극(The Tragedy of the Commons)’이라는 이론이 있다. 임자 없는 돈 또는 물건, 즉 공공재(公共財)는 필연적으로 비극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인간사회에서 가장 흔하게 일어나며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만 없애기 힘든 고질병이 바로 공공재의 비극이다.

 이론은 간단하다. 무더운 여름날 공공장소 냉장고에 100명을 위해 100병의 시원한 음료수를 넣어뒀다 치자. 한 사람당 한 병씩 마시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나중에 보면 꼭 못 마시는 사람이 생겨난다. 누군가 앞에서 2병 이상을 마셨거나 아니면 슬쩍 꺼내다가 자기네 냉장고에 감춰뒀기 때문이다.

 탐욕인지, 한 병으론 도저히 풀 수 없는 타는 목마름인지 이유야 많을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음료수가 개인의 소유가 아닌 100명 모두의 공공소유, 뒤집어 말하면 임자 없는 물건이라는 사실이다.

 공공재의 분배와 사용에 대해 불특정인들에게 자율권을 주면 반드시 뒤탈이 남는다. 자기 몫 이상을 차지하거나 소외당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소외당한 개인의 손해로 끝나고 만다면 아마 공공재의 비극은 크게 주목받지 못할 것이다. 전체 구성원의 불행으로 귀결되기 때문에 문제가 크다. 

 이 이론은 경제학자의 작품이 아니다. 미국의 생물학자 개럿 하딘(Garrett Hardin)이 처음 만든 개념이다. 하딘은 1968년 12월자 사이언스지 ‘공유지의 비극’이란 논문을 실었는데 바로 여기서 비롯됐다.

 줄거리는 이렇다. 마을 공동소유 목장이 있다. 소 500마리를 방목하기에 적당한 공유지 풀밭이다. 10집이 50마리씩 사이좋게 소를 키웠다. 그러다 한 집에서 욕심이 생겨 100마리를 풀어 넣었다. 그러자 그 초지는 황폐화돼 마침내 마을주민 모두 소를 키울 수 없게 됐다는 것.

 환경파괴를 경고하기 위해 내세운 이 가설은 경제학, 정치학 등 사회과학 쪽으로 확산돼 마침내 공공재는 그대로 두면 비극으로 끝난다는 고전이론으로 자리 잡았다. 

 공금도 임자 없는 돈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는 점에서 일종의 공공재다. 오래전 일이다. 한국 외교부 어느 직원이 내부 전산망에 재외공관들의 공금유용 실태를 폭로하는 글을 올린 적이 있다. 법인카드의 개인사용은 기본이고 출장기간 위조, 공관만찬 참석자 늘리기, 각종 비용 부풀리기 등등 낯 뜨거운 내용이 가득했다. 

 그때 감사원 자료엔 이런 사례도 나온다. 어떤 공관에서 총영사가 한인단체장이나 직원들을 틈만 나면 관저로 불러 식사를 대접했다. 전속 가정도우미가 해주는 간단한 저녁식사에도 초대받은 사람들은 총영사가 일 열심히 한다고 입이 닳도록 칭송했다. 그 밥 한 그릇당 100달러짜리 영수증이 제출됐고 돈은 누군가 주머니로 들어갔는데도 말이다. 

 비단 정부돈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크고 작은 단체들의 공금에도 비극이론은 그대로 적용된다. 단체장이나 옆에서 콩고물이라도 얻어먹는 사람들 뇌리에 공금은 말 그대로 공돈, 임자 없는 돈이라는 인식이 뿌리내렸기 때문에 부조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공금유용은 죄악’이라는 인식이 있다면 공공재 이론은 애초 태어나지도 않았을 터. 

 공공재의 비극 가운데 가장 초보단계가 비효율적인 사용이다. 그 다음이 횡령 또는 유용이고 최악의 비극은 전 구성원이 다함께 죽는 데 돈을 쓰는 짓이다. 내 소 몇 마리 더 키우기 위해 마을 전체를 초토화시키는 바로 그 행태다.

 막을 수는 없을까? 물론 가장 중요한 건 윤리의식이다. 말은 쉽지만 공자말씀에 지나지 않을 공산이 크다. 윤리도덕만으로 비극을 막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정답은? 경제학에선 공공재를 지키려면 정부가 개입하거나 사유화를 통해서 개인이 통제하고 관리하게 해야 한다고 답을 제시한다. 이것도 불가능하다. 크고 작은 단체들의 공금까지 ‘공공재의 비극’을 막기 위해 공권력을 불러들일 수는 없는 일.

답이 없다. 깨어있는 자들이 똘똘 뭉쳐 지키는 길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