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결(多數決) 원칙이라는 게 있다.

말 그대로 다수의 뜻에 따라 결정하는 방식이다. 민주주의의 핵심이자 한계이며 또한 비극의 씨앗이다. 다수의 뜻이 곧 다수의 이익과 동의어는 될 수 있을지언정 인류의 보편적인 정의(正義)나 선(善)과 일치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데 문제가 있다.

하버드대의 다니엘 골드하겐(Daniel Goldhagen) 교수는 ‘히틀러 일을 기꺼이 집행한 사람들(Hitler’s Willing Executioners)’이라는 책에서 다수결의 함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다 아는 일이지만 히틀러는 쿠데타를 자행하거나 불법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찬탈하지 않았다. 지극히 정상적이고도 민주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잡았다. 히틀러는 당시 1차 대전 패전의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있던 독일인들에게 희망이었다. 혜성같이 나타나 좌절감과 열등감, 이유모를 증오심에 빠져있는 독일국민들의 감성을 예리하게 짚어냈고 최대한 활용했다.

히틀러는 1933년 선거과정에서 유태인에 대한 증오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치당이 독일민족의 우생학적 우수성을 주장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과정에서 가장 손쉬운 대상인 유태인을 먼저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대중은 히틀러의 매력에 빠져 들었다. 그가 집권하면 어떤 비극이 일어날 지를 본인이 예고했고 독일국민들도 잘 알아들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더 열광했다. 그리하여 히틀러는 독일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화려하게 세계사 전면에 등장했다.

중우정치(衆愚政治)니 뭐니 하는 것은 고대 그리스시대에도 있었으니 20세기 독일에서 일어난 특별한 현상은 아니다. 대중을 어리석다 규정하는 것 자체가 오만이다. 아니면 대중에게 현명한 선택을 기대하는 건 애초부터 부질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독일인들의 허황한 자존심을 한껏 부풀린 히틀러는 밖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폴란드를 무력으로 짓밟자 독일인들은 희열과 환호로 답했다. 양심의 가책이나 침략자에 대한 규탄? 그건 도덕교과서에나 나오는 말. 파리를 점령하자 나치 국가주의의 승리를 목청껏 외쳤다. 유태인을 비롯한 주변 민족 수백만이 나치 제단에 제물로 올라가는데도 열광이 꺼지기는커녕 더욱 활활 탔다.

물론 반(反)나치 투쟁이 없었던 건 아니다. 영화화까지 돼 영웅으로 떠올랐던 젊은 장교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전쟁광’ 히틀러를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처형됐다. 그러나 그도 역시 처음엔 히틀러야말로 독일민족을 구할 진정한 지도자라 믿었다.

‘백장미단’이라는 다소 중세스러운 이름의 반나치 단체도 있었다. 뮌헨대 학생과 교수들로 구성된 이들 역시 한때 열렬한 히틀러 숭배자였지만 반나치투쟁의 선봉으로 변신했다. 이들 역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밖에도 반나치 투쟁을 벌인 독일인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들이 다수 독일국민의 양식과 양심을 대변했다는 증언은 그리 많지 않다.

지금 이런 얘기를 하면 독일국민들은 억울해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골드하겐 교수는 앞에 든 책에서 “평범한 독일인들도 홀로코스트(Holocaust)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나 그것을 반대한 게 아니라 오히려 거리낌 없이 살육에 동참했다”고 주장한다. 그나마 독일과 독일국민이 평가를 받는 것은 과오를 인정하고 피해자와 세계를 향해 고개 숙였으며 지금까지도 기회만 있으면 고개를 숙일 줄 안다는 점 때문이다.

옳지 않은 다수의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그렇다고 이 글을 ‘소수가 옳다’는 말로 오독(誤讀)하는 이는 없을 줄 믿는다. 경계해야 할 것은 “다수니까~” 또는 “비록 소수지만~”이라는 전제를 붙여놓고 자기와 다른 견해를 결코 인정하지 않는 행태다.

민주주의라 하여 독선을 소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걸 허락하지는 않는다.. 더욱이 개인견해를 역사적 사명감 운운 거창한 논리 앞세워 우기는 건 21세기에 걸맞지 않은 구시대 유물이다. 역사는 소수든 다수든 비정상적인 집단의 자기변명 수단이 아니다. 내 의견과 다른 의견도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 민주주의의 기본 중에서도 기본이다.

살인적인 폭염으로 자칫 이성을 잃기 쉬운 계절, 건강한 토론토한인사회를 가꿔 나가자는 의미에서 뜬금없이 민주주의 얘기를 꺼내봤다. (조영권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