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알래스카와 유콘의 대자연
천상천하 유차독존(天上天下唯車獨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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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발 1천 미터 산중턱을 달리는 알래스카 화이트패스 기차. |
나 혼자다. 까마득한 앞에서 자동차 한 대가 개미새끼만 하게 보일락 말락, 백미러에 차가 나타날 리는 만무. 시속 180km를 누가 추월하랴.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뒤따라온 정재용 캐나다기아차법인장은 189kmm로 달렸다 한다.
셋쨋날 새벽 5시45분. 다들 칼같이 호텔 앞에 모였다. 참 신기했다. 캐나다 전역에서 모인 현지 신문방송기자 20여 명이 주최 측이 짜놓은 스케줄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한국에선 이런 말도 있는데. 부산에서 서울까지 기자 3명을 기차 타고 ‘모시고’ 오는 것보다 돼지 3마리를 몰고 걸어오는 게 차라리 쉽다는 것.
이날 예정 운전거리는 450km. 대자연 앞에서 잘 닦인 하이웨이는 한낱 실오라기에 불과했다. 운전을 시작한 지 20여 년, 난생 처음으로 경찰과 교통법규 걱정 없이 마음껏 내쳐 달려봤다. 앞뒤에서 차가 사라진 지 오래. 차선도 필요 없다. 중앙차선을 밟고 길 한가운데에서 바닥까지 가속기를 밟았다.
아까웠다. 양편에 펼쳐지는 달력 속 풍경화들을 시속 180km로 흘려보낸다는 게 안타깝다. 그렇다고 이런 곳에서 120km 거북이걸음을 할 수도 없고. 알래스카 스캑웨이에서 유콘 헤인즈정션(Haines Junction)까지 300km길은 해발 1천 미터 고원지대를 지난다.
비경이었다. 한여름인데도 중턱부터 정상까지 만년설을 둘러쓴 2천~3천 미터 연봉(連峰)들을 거느리고 폭 5~10km 협곡이 200km 가까이 이어진다. 폭주를 하면서도 틈틈이 곁눈으로 풍광을 훔쳐보며 차 댈 곳을 찾는데 마땅한 곳이 없다. 어디든 차를 세울 수야 있겠지만 이것저것 따지다보니 휙휙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고원지대 한가운데 넓은 휴게공간이 있었다. 해발 1,070미터. 겨울엔 길이 폐쇄된다는 안내문이 걸려 있었다. 채드는 멈추자마자 마치 차를 분해라도 할 듯 구석구석에 카메라를 들이댔다. 가끔 필자를 모델로 사용하기도 하며. 멋진 차에 기댄 달력그림 모델은 중년 남자가 아니었는데.
간이휴게소에서 색다른 이와 조우했다. 100대도 더 세울 수 있는 넓은 주차장에 차는 두세 대 정도. 7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한국인 부부가 걸어 나왔다. 밴쿠버나 토론토에서 온 교민이겠지. 웬걸. 서울에서 왔단다.
노부부는 올해로 10년째 여름마다 알래스카-유콘 일대를 이렇게 자동차로 둘러본다고 했다. 대단해 보였다. 젊은이들에게도 위험해 보이는 오지 자동차여행을 노부부 단둘이 하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다시 출발할 때 머리에 수건 질끈 동여맨 부인이 운전석에 올랐다. 남편이 조수석 차문을 열며 말했다. “이제 힘들어서 운전 못 하겠어요. 올해가 마지막 여행이 될 것 같아요.” 가던 길 재촉하는 노부부에게 뒤에서 큰 소리로 인사를 던졌다.
“아닌데요. 20년은 충분히 더 여행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4. 돌아오는 길
시승행사 참여기이기에 그냥 하는 말은 아니다. 시속 180km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옆에 탔을 땐 20대 젊은 기자 채드가 150km만 속도를 내도 오금이 저려왔는데 정작 필자가 운전대를 잡자 더욱 미친 듯 달려댔다.
옆자리를 힐끗 봤다. 아닌 척 했지만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더 세게 가속기를 밟았다. 채드는 목을 빼고 자주 속도계를 훔쳐봤다. 단순한 궁금증인 양 위장했지만 나는 안다. 그대 속으로 떨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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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정 넘치는 26세 기자 채드는 마치 싸움이라도 할 듯 자동차와 맞붙어 사진취재를 했다. |
채드는 그런데도 “고속주행인데도 안정감이 좋다. 바람소리, 엔진소리도 비교적 조용한 편”이라며 칭찬을 이어갔다. 의례적이거나 불안감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이어어 스티어링, 변속, 방향전환 등 흠 잡을 데 없다고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진지한 표정이었다.
스포티지가 소형 SUV이기에 가끔 힘이 부친다는 느낌이 들었다. 배기량 2.4리터에 176마력이니 중대형 차에 익숙한 사람들은 파워풀한 느낌을 경험하기 힘들 수도 있다. 물론 최고속도 200km도 가능하니 힘없어 달리지 못하는 일은 없지만.
다시 하이웨이. 위험한 건 어이없게도 말똥이었다. 처음엔 몰랐다. 대로 한복판에 웬 진흙덩이가 저렇게 많을까 의아하게 생각하던 차 누군가가 궁금증을 풀어줬다. 알래스카와 유콘·매니토바 일대엔 야생마들이 적지 않게 산다고 한다. 길가에서 십여 마리씩 떼 지어 풀 뜯는 모습이 목격되곤 했다. 그런데 이 녀석들이 풀밭에서만 놀면 좋겠는데 길 가운데로 올라와 펑퍼짐하게 실례를 해놓으니 문제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서스캐체원과 매니토바, 온타리오는 직선과 사각형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유콘과 알래스카에선 날카로운 삼각형과 실타래 풀어놓은 듯한 제멋대로의 산길뿐이다.
협곡이 끝나는 지점, 알래스카와 유콘 교통 요지인 헤인즈정션에서 운전대를 넘겨줬다. 왼쪽으로 가면 앵커리지, 오른쪽으로 가면 화이트호스. 화이트호스까지는 150km. 채드는 복수라도 하듯 필자의 불안한 표정을 즐기며 마구 달릴게다.
그러나 어쩌랴. 마지막 구간 출발 시 다른 자리를 경험해보겠다는 이유로 뒤로 넘어가서 그만 푹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눈을 뜨고 보니 화이트호스 13km 이정표가 보였다. 모르는 사이 얼마나 빨리 달렸는지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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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이트호스에서 알래스카 스캑웨이로 가는 도중 만난 호수 속의 섬 비경. |
5. 화이트호스와 한국
마지막 날 화이트호스시청 관광담당 책임자인 쉴라 도드 여사가 만찬 테이블에 합석했다. 그녀는 한국을 잘 안다고 했다. 한국은 2001년 9월11일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나라가 되었다고 한다.
바로 그날이었다. 필자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모든 신문들이 편집마감을 하고 추가로 들어오는 기사만 고쳐 넣는 신문용어로 이른바 ‘개판(改版)’만 하는 평범한 밤이었다. 갑자기 미국에서 세계무역센터가 공격당하고 여기저기서 테리리스트에 납치당한 여객기들이 떨어졌다.
엄청난 사건 앞에서 한국 국민, 언론 모두 당황해 있었다. 그때 더욱 경악할 만한 뉴스가 편집국으로 날아들었다. 알래스카 인근에서 대한항공 비행기가 갑자기 사라지며 소식이 끊겼다는 것. 당시 북미지역 하늘엔 사상 최초로 운항금지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일순간 대한민국 전체가 극도의 공포감에 휩싸였다. 그동안 몇 차례 KAL기가 추락당한 적이 있어 걱정은 더욱 컸다. 신문사엔 KAL기에 대한 어떤 후속 정보도 접수되지 않았다. 죽음 같은 긴장은 한 시간가량 지속됐다.
정적을 깨고 들려온 첫 소식이 KAL기가 화이트호스에 무사히 착륙했다는 것이었다. 여객기 조종사의 실수로 미국공군과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지 않는 바람에 이곳에 내려앉았다. 여기까지는 필자가 한국에서 안 내용이다.
도드 여사가 전하는 이곳 상황은 이랬다. 그날 밤 갑자기 화이트호스 전역에 비상대피령이 내려졌다. 어느 여객기가 테러리스트에 납치돼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미공군은 전투기를 대거 발진시켰다.
2만여 시민이 모두 집을 버리고 대피했다고 한다. 공항은 만반의 준비를 갖춘 군과 경찰 등 비상요원이 지키고. 전투기들은 가장 가까운 화이트호스공항에 여객기를 강제 착륙시켰다. 어이없게도 당황한 대한항공 조종사가 영어를 잘못 구사하는 바람에 미공군이 공중납치로 단정하는 사태로까지 이르렀다.
사건내막이 밝혀진 뒤 화이트호스 시민들은 쓴웃음을 날렸고 덕분에 한국은 이곳 주민들에게 친숙한 나라가 되고 말았다. 화이트호스 공항 대합실에 미국 알래스카주의회가 이곳 시민들에게 보낸 감사장이 걸려 있다.
“2001년 9월11일 KE085편이 강제착륙할 때 알래스카를 위해 위험과 불편을 기꺼이 감수해준 화이트호스 시민들에게 감사를 보낸다.”
이것 말고 한국과 별로 인연이 없어 보이는 이곳 오지에도 기아차 대리점이 있었다. 하필 왜 이곳에서 시승행사를 하느냐는 질문에 정재용 법인장이 답했다.
“알래스카와 유콘에서 기분 좋게 잘 달릴 수 있는 자동차라면 캐나다 어디에서도 합격 아닐까요?”
뉴스포티지
모델: 기본형~EX럭셔리 총 7종
배기량: 2,400cc(4기통)
파워: 176마력
연비: 100km당 6.3리터(고속도로)/10.1리터(시내)
길이: 4.44m(14.56ft)
폭: 1.86m(6.10ft)
높이: 1.64m(5.38ft)
탑승인원: 운전자 포함 5명
가격: 2만2천~3만5천 달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