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선이는 세 살.
어느날 아파트 놀이터에서 선이는 어떤 아저씨를 “아빠”라 부르며 졸졸 따라다녔다. 옆 동네에 사는 선이 또래의 아빠였다. 친구가 아빠라 부르니 선이는 무슨 뜻인 줄도 모르고 그렇게 불렀다. 이영미(가명. 31)씨는 멀지 않은 곳에서 딸을 지켜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선이는 지금도 아빠의 개념을 모른다. 누구네 집을 가든 그 집 아빠를 아이들 따라 똑같이 부른다. 그러나 아직까지 한 번도 아빠가 무슨 뜻인지, 누구인지 엄마에게 물어온 적은 없다.
선이는 의젓하다. 세 살배기가 철든 아이처럼 행동할 때 엄마는 가슴이 저려온다. 태어나서 말귀를 알아듣기 시작한 이래 선이는 큰 소리를 내지 않는다. 마음 놓고 목 놓아 울만한 공간을 가져본 적이 없다. 지금 선이 모자가 사는 곳은 침실 한개짜리 아파트의 거실 한쪽.
침실은 주인집 아들이 쓰고 거실에서 여자주인과 선이 모녀가 함께 산다. 월세 500달러로 구할 수 있는 집은 더 이상 없다. 어린 아이 딸렸다고 다들 거부하는데 그나마 받아준 것만 해도 고마울 뿐.
이영미씨는 2007년 9월 만삭의 몸으로 토론토에 도착했다. 피붙이는커녕 얼굴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역땅이었다. 출산과 육아엔 까막눈인 그는 캐나다 의료시스템의 도움에만 전적으로 의존한 채 선이를 낳고 키웠다. 다행히 딸은 큰 탈 없이 잘 자라줬다.
“모르겠어요.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아무튼 제 스스로 저질러서 여기까지 왔기 때문에 고통스럽지만 후회하거나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어요.”
그는 중국 심양출신이다. 이른바 ‘조선족’이라 부르는 우리 동포다. 거기서 태어나 학교도 다녔고 사업도 했다. 20대 젊은 나이에 인터넷쇼핑몰을 만들어 신발 가방 등 패션용품을 팔았다. 돈도 제법 벌었다.
남자를 만났다. 한국에서 사업차 온 이모(38)씨. 당시 30대 초반, 20대 중반 꽃다운 남녀의 상열지사(相悅之事)는 자연스러운 일. 급기야 임신까지 하게 됐다. 2007년 4월 급하게 서둘러 결혼까지 마쳤다.
2년 넘게 연애를 할 땐 그렇게 좋더니 결혼하자마자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하루도 싸움을 거르는 날이 없었다.
“넌 한국여자가 아니야. 역시 중국여자는 어쩔 수 없어.”
다른 건 다 몰라도 이 말만은 견딜 수 없었다. 상처가 너무 컸다. 이대로 아이를 낳을 수는 없다. 이 악물고 산부인과병원을 찾아갔다가 마음 약해져 돌아온 게 한두번이 아니다.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딸에게 큰 죄를 지은 것 같다.
이들 부부에게 이민브로커가 접근했다. 돈을 조금만 쓰면 몇 달 안에 신천지 캐나다로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귀가 번쩍 띄었다.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서 이민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파경에까지 이른 남편은 “먼저 가 있으면 바로 따라 가겠다”고 다짐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모른다. 분명한 건 지금 이대로 이 남자와 함께 살수는 없다는 것, 그렇다고 여자 혼자 아이를 낳아 키우는 건 중국땅에선 더욱 힘들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면 그래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지금까지 그래왔듯 내가 못할 게 뭐 있느냐는 막연한 자신감이 그녀 등을 떠밀었다. 무모한 짓이라는 게 확인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캐나다는 그리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다. 도착하자마자 이민브로커의 지시대로 영주권을 신청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를 낳았다. 젊은 임산부가 혼자 택시를 타고 병원에 뒤뚱뒤뚱 들어오니 난리가 났다. 엄마가 아이 키울 능력이 없으면 정부가 임의로 아이를 빼앗아 양육기관에 위탁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 와중에서도 혹시 아이를 빼앗길까 극도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영어 한마디 할 줄도 들을 줄도 모르는 주제에.
오겠다던 남편은 오지 않았다. “당신 딸이 100일을 맞았다”며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조금만 더 기다리라는 답장이 왔다. 아이 사진도 보내줬다. 1년 뒤 밝게 찍은 돌사진과 함께 더 간절한 호소문을 보냈다. 답이 없었다.
얼마 지나자 아예 이메일마저 차단됐다. 일부러 막아놓은 것 같았다. 그걸로 끝이었다. 그렇다고 중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 수중의 돈도 떨어졌다. 아직 영주권도 받지 못했는데.
정부복지 밖에 기댈 곳이 없었다. 요즘 이씨가 받는 복지수당은 주거비 포함 총 1,050 달러. 주거비는 500달러가 상한선이라 더 비싼 곳에서 살 수가 없다. 연이가 태어난 이후 이사를 4번 했다. 한집에서 10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아이 때문이었다.
이사는 전쟁이다. 모녀가 살 수 있는 500 달러짜리 집을 구하기도 힘들뿐더러 마지막 순간에 어린 딸이 있다는 얘기를 하면 대부분 퇴짜다. 선이가 이를 눈치 챈 것 같다. 이러니 또래들보다 어른스러울 수밖에. 실제 선이는 인터뷰 내내 엄마 곁에 있으면서도 다소곳했다. 시간이 약간 흘러 익숙해지자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도 걸고 필자 손을 슬쩍 잡기도 했다. 예뻤다.
이영미씨는 영주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영어공부도 쉽지 않다. 링크(LINC)의 경우 유아보호시설이 있으나 영주권자 이상만 해당된다. 일반 ESL학교는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생각도 못한다.
그나마 다행인건 우울증 위험에서 벗어났고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줬다는 점. 지난해 6월 조이모자선교회에서 심코호수로 수양회를 갔다. 비슷한 처지의 싱글맘 가족 40여명이 2박 3일간 마음껏 울었다. 이씨도 그때 처음으로 토론토에서 자신의 얘기를 이웃에 모두 털어놓았다. 이곳에서 만난 분들이 이제 친언니가 됐고 딸에겐 친이모다.
주변에선 때로 권하기도 한다. 젊고 앞날이 창창하니 남자를 만나보라고, 소개해주겠다고… 그러나 한번 닫힌 마음의 문이 정말 열릴지 자신이 없다. 문제는 상대에게 있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있다는 걸 절감한다.
지금 이영미씨에게 딸 선이는 은인이다. 삶의 전부다. 대화도중 딸을 바라보며 눈물을 닦은 휴지가 수북히 쌓였다.
조영권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