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걱정 안 해도 되는 이유
1. 전쟁·혁명 등 특수상황 아니면 평시 재정·통화정책으로 조절 가능
2. 현재 미국은 사실상 디플레이션 지난달 캐나다 물가상승률 ‘제로’
3. 통화 급증불구 화폐회전속도 낮아 4. 인플레조짐 보이면 中銀 ‘돈 회수
요즘 속속 발표되는 각종 경제지표를 보면 북미경제의 하강속도가 현저히 둔화, 조만간 경기가 바닥을 치고 연말 이전에는 본격 회복이 시작될 것을 예고한다. 더러는 벌써부터 호황이 불러올 인플레를 걱정하는 이들도 있다. 그간 금융위기가 가져다준 불황을 타파하기 위해 엄청난 통화를 남발, 인플레를 피할 수 없다는 논리다. 이런 우려가 현실성이 있는지 살펴보자.
인류역사상 지나친 통화남발은 항상 인플레를 유발했다. 1차, 2차대전 직후 독일과 항가리가 겪었던 하이퍼인플레(hyperinflation)는 역사상 가장 심했던 것들로 알려져 있다. 두 나라에서 인플레가 극에 달했을 때는 물가가 하루에도 몇 배 뛰어 월급(?)을 하루에 두 세 번씩 지급해야하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도 있었다. 전쟁으로 세금은 걷히지 않는데 전쟁비용은 한없이 늘어나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정부가 돈을 무작정 찍었기 때문이다. 이런 지폐본위(fiat money standard)가 아닌 금본위(gold standard)하에서의 인플레 사례로는 스페인을 들 수 있다. 스페인은 신대륙에서 대규모 금맥발견 후 급속한 통화팽창으로 장기간 인플레에 시달리다가 국력이 약화, 결국 영국에 세계주도권을 넘겨주게 된다. 이같이 극심한 인플레는 전쟁, 혁명 또는 대규모 금맥발견 같은 특수상황에서 일어난다. 평상시에도 인플레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재정 및 통화정책으로 조절이 가능하다. 최근 금융위기로 각국정부는 근래 보기 드물게 통화를 남발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풀려진 통화가 경기회복과 더불어 악성인플레의 요인이 될 것으로 우려한다. 과연 그럴까. 물론 세계대전 같은 커다란 사회·경제적 혼란이 없을 것이라는 전제하에서다. 인플레는 물가의 상승이다. 물가상승은 재화와 서비스의 가격이 전반적으로 오름을 의미한다. 재화나 서비스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된다.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면 가격이 오른다.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면 가격은 내려간다. 재화와 서비스의 공급은 생산시설의 확장과 노동생산성의 향상으로 인해 꾸준히 증가한다. 이 증가율을 잠재성장률이라 한다.
경제의 총수요 증가율이 총공급 증가율 즉 잠재성장률을 능가하면 물가는 오르게 된다. 잠재성장률이 총수요 증가율을 능가하면 물가는 내려간다. 총수요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통화량에 화폐회전속도를 곱한 것이다. 통화량 증가가 반드시 총수요의 증가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통화량이 늘어도 화폐회전속도가 더 떨어지면 총수요는 오히려 내려갈 수 있다. 작년 겨울과 금년 봄 금융위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 각국 중앙은행들이 통화량을 무제한 늘렸어도 금융기관들이 돈을 풀지 않고 기업체와 소비자들이 지갑을 닫아 화폐의 회전속도가 바닥으로 내려가 총수요가 증발해 버린 것은 이런 이유다. 이런 현상은 극심한 불황이나 공황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유동성의 함정(liquidity trap)’이라 한다. 90년대 일본에서 일어났다. 반면 통화량 공급의 증가 없이 화폐회전속도의 증가만으로도 총수요가 늘어날 수 있다. 호황이 오랫동안 계속돼 경기가 과열되면 화폐회전속도가 빨라져 통화량의 팽창 없이도 총수요가 증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금융위기가 불황을 초래한 주요 원인은 금융기관들의 대출여력 폭락과 함께 경제주체인 기업과 소비자들이 돈을 쓰지 않아 화폐회전속도가 급강하한데 있다. 이로 인해 총수요가 폭락하고 재고가 쌓여 생산자들의 생산의욕을 저하, 실업률이 올라가면서 불황에 가속도가 붙은 것이다. 지금처럼 화폐회전속도가 낮은 상황에서 통화량의 팽창이 당장 인플레를 악화시킬 염려는 없다.
지난 5월 미국의 물가상승률은 전년 동기대비 마이너스 1.3%로 거의 60년 만에 최저다. 인플레가 아닌 디플레다. 지난달 캐나다 물가상승률도 0.1%로 사실상 제로다. 물론 경제가 회복되면 화폐회전속도가 다시 빨라져 인플레 유발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러나 사태가 그렇게 되기 전에 각국 중앙은행들은 그동안 풀었던 통화량을 필요만큼 서서히 회수할 것이다. 중앙은행들이 통화량을 회수하기 시작하면 이율이 올라가게 마련이다. 이것을 예측해 국제자본시장에서는 벌써부터 중장기 이율이 올라가고 있다. 이율이 계속 올라가면 경기회복은 지연될 것이다. 현 상황에서 이율을 많이 올릴 수 없다는 얘기다. 각국 중앙은행들은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해 경제성장률이 잠재성장률을 크게 이탈하지 않는 범위 내에 머물게 하려고 노력할 것이므로 이의 필요조건인 물가의 안정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물가를 안정시키고, 지속적으로 가능한 최대한의 경제성장률을 잠재성장률이라 한다. 그 이상의 성장률은 인플레 유발요인이 된다. 인플레의 고삐를 늦추면 경제성장률을 잠재성장률 이상으로 올릴 수 있다. 그러나 고삐 풀린 인플레는 시간이 갈수록 속도가 붙기 때문에 이를 잡기위해선 다시 통화량을 줄이고 이율을 올려야 한다. 이것은 경기의 둔화를 가져오며 정도가 심하면 불황으로 나타난다. 반면 긴축적인 통화정책으로 경제성장률을 잠재성장률 밑으로 유지하면 물가는 안정되나 경기가 침체되고 실업률이 올라가 경제성장의 잠재력을 낭비하는 결과가 된다. 이런 정책이 오래 유지되면 물가가 계속 떨어지는 디플레현상이 나타나 불황이 공황수준으로까지 악화될 수 있다.
이상적인 것은 경제성장률을 잠재성장률 수준과 일치하도록 유지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인플레를 낮게 유지, 물가안정을 도모하는 길밖에 없다. 1~2%의 물가상승률이 물가안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경제학자들은 본다. 캐나다나 미국의 잠재성장률은 2.5~3% 정도로 예상한다. 캐나다중앙은행은 인플레 허용범위를 잠재성장률 유지에 적합한 수준인 1~2%로 정하고 있다. 미국은 2% 정도다. 이런 정책 방향은 70~80년대 악성인플레 경험을 교훈삼아 지난 20년 간 유지해온 것으로 이번 금융위기로 흔들릴 가능성은 아주 낮다. 인플레의 허상에 놀랄 필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