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 속에 있는 사마귀란 곤충은 육식동물로 풀잎같이 위장하고 있다. 잠자리, 나비 또는 지나가는 애벌레까지 잡아먹는다. 습성 중에 이상한 점은 교미가 끝나면 암컷이 수컷을 잡아먹어 사악한 곤충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곤충학자들의 끈질긴 연구결과 수컷이 암컷한테 잡혀 먹히는 게 아니라 수컷이 스스로 암컷 먹이로 자처하는 행위로 결론지었다. 즉 수컷은 자신의 정자가 암컷에 수정되면 건강한 새끼(유충) 출산을 위해 자신의 몸을 암컷에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곤충학자들은 수컷을 잡아먹은 암컷의 유충과 그렇지 못한 유충은 크기부터 확연히 차이가 있음을 확인했다. 즉 그런 야만행위는 종족보존을 위한 자연적 선택이었던 것이다. 만약 과학이 이런 사실을 찾아내지 못했다면 사악한 사마귀란 낙인을 벗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 하나 예를 들면 영국에 있는 스톤헨지(Stonehenge)는 4,500년 전 선사시대 때 세워진 거석(巨石)으로 어떤 용도였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리하여 후세사람들은 선조들이 천체(天體)를 연구하기 위한 건축물로 미화해왔으나 2008년 그 주위에 공동으로 묻혀있던 시체들의 뼈를 최첨단분석기로 정밀검사한 결과 암이나 심한 질병을 앓다가 죽은 사람들이었다. 건축하다 죽은 사체라는 추측은 오판이었다. 결론적으로 스톤헨지는 천체를 연구한 곳이 아니라 각처에서 병자가 몰려와 영(靈)차원의 병 치유를 빌었던 건축물로 최종결론이 났다.
두 이야기는 과학자들이 파헤친 작은 사례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가 감(感)에 의해 사물을 잘못 판단했던 개념을 바꾼 사례다. 이같이 과학은 늘 새로운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을 뿐 아니라 그동안 잘못 인식했던 개념을 바로 잡아주는 학문이다. 이런 과학의 공헌덕분에 우리는 사물을 보는 눈이 옛날사람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수준이 높아졌지만 그래도 논리성보다 감(感)에 의한 판단을 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대부분의 식물들은 하늘에서 뿌려주는 빗물이면 생존이 가능해 기암절벽이라도 갈라진 틈에 물이 고일 수 있으면 나무는 뿌리를 내린다. 과학적으로 봤을 때 나무가 기암절벽에 뿌리내려도 조금도 이상할 게 없는데 우리의 마음은 감상적으로 치우칠 수 있어 나무를 과대평가하기 쉽다는 이야기다. 즉 흙도 없는 바위에 붙어사는 나무는 특별한 의지력을 갖고 있다고 믿는데서 오류가 시작된다. 학생이 그런 의지에 감명 받아 열심히 공부했으면 다행이지만 종교인이 감명을 받아 더 열심히 신앙에 몰두하다보면 어느새 맹신이 되고, 장사꾼이 감명을 받아 악착같이 돈만 벌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수전노가 되고 만다는 얘기다.
이는 옛날 노자(老子)가 말한 도(道)를 닦고 닦아 도통하고 보니 도가 아니었다(道可道非常道)라는 허무주의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과학이 부재했던 옛날 학문은 감성에 의존한 점이 많아 결국 비상도(非常道)로 끝나고 마는 경우가 많다. 지금도 과학성이 배재된 옛날 학문에만 집착해 도를 닦아보았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란 애매모호한 결론만 내놓고 만다.
그러면 과학만이 도(道)를 깨우칠 수 있는 학문이란 말인가. 그런 뜻이 아니고 과학과 가까이하면 우리 마음에 논리적인 사고가 형성되고 사물을 올바르게 보는 잣대를 가질 수 있다는 의미다. 흔히 말하는 ‘도통(道通)’이란 우주섭리와 영(靈)의 세계를 생전에 통째로 깨우친다는 뜻인데 이는 과학적으로 보았을 때 있을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본다. 우리는 자연을 마스터한다기보다는 자연섭리를 교훈삼아 자신의 마음을 성숙시키는데 생의 가치가 있다고 봐야한다. 도를 닦아 우주의 본질을 통달하겠다든지 우주의 일원인 영(靈)에 구원이란 조건을 붙이는 행위들은 과학적 잣대로 보았을 때 감(感)에 의한 오류이기 때문에 결국 비상도(非常道)란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과학자라고해서 꼭 과학철학을 가졌다고 볼 수 없다. 그 대신 누구나 과학을 사랑하는 마음이 싹트면 과학의 잣대가 마음속에 형성돼 논리적이고 성숙한 생각을 하게 된다. 결론을 짓는다면 과학의 향기가 우리 마음에 스며들 때 비로소 마음이 흔들림 없이 걸어야할 탄탄대로가 보이게 될 것이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노자의 ‘도덕경’ 첫머리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도(道)는 말로 설명하거나 글로 개념화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도가도비상도’에 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름할 수 있는 이름은 항상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 없음은 천지의 처음이요, 이름 있음은 만물의 어머니다. 그러므로 늘 없음에서 그 오묘함을 보려하고, 늘 있음에서 그 갈래를 보려고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