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펜실베니어주 피츠버그에서 40마일 떨어진 작은 동네에서 태어난 프릭은 오터바인 대학교를 중퇴하고 21세 때 두 사촌 및 친구와 동업으로 프릭코크스회사(Frick Coke Company)를 세웠다. 1861년 앤드류 카네기가 경쟁이 심한 기차사업을 피해 기차생산에 필수적인 철강사업을 시작, 크게 번창할 때 프릭은 1871년 철강산업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코크스 생산사업에 진출했다. 특히 펜실베니어주의 풍부한 유연탄광은 코크스 대량생산을 가능케 했다.
1880년(31세) 같은 아일랜드계의 멜런(Andrew Mellon)에게서 융자를 얻어 동업자들의 지분을 사들인 프릭은 회사명을 프릭주식회사(H.C. Frick & Company)로 바꾸고 불경기 탓에 헐값에 내놓은 4만 에이커의 거대한 탄광을 사들였다. 또한 1천명이 넘는 종업원으로 1만2천 개의 코크스 가마를 작동해 세계 최대의 코크스 생산공장을 가동시켰다. 코크스 사업에 진출한지 10년 만에 불과 31세의 나이로 백만장자의 꿈을 이룬 것이다.
철강 생산에 필수적인 고가의 코크스는 카네기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우연한 기회에 카네기는 아내 애들레이드와 뉴욕에서 신혼여행 중인 프릭을 만나 동업을 제의했다. 그들은 서로 상대방 지분을 사들여 카네기철강사로 통합하는데 합의했다. 1889년(40세) 카네기가 현역에서 은퇴하고 프릭이 카네기철강 회장직을 맡았다.
1892년(43세) 프릭은 더 많은 이익금을 내기 위해 임금 하향조정을 제의했다. 노조원들이 심하게 반발하자 카네기를 스코틀랜드로 ‘피신여행’을 떠나게 하고, 프릭은 파업 중인 노동자들에게 강제로 저임금정책에 서명하게 했다. 결국 미국 역사상 가장 참담한 홈스테드 노사분규(2008년 1월25일자 참조)가 일어나 총격전으로 비화, 16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군대가 투입돼서야 파업이 종식됐다.
우여곡절 끝에 프릭은 노동자들의 임금을 반으로 줄일 수 있었으나 전국의 노동자들로부터 외면당했다. 그는 2009년 ‘아메리칸시티 비즈니스저널’이 선정한 ‘미국 역사상 최악의 경영자 20인’ 중 11위를 차지했다.
노사분규 중 알렉산더 버크맨은 그의 연인이자 같은 무정부주의자인 엠마 골드맨과 함께 1892년 7월23일 프릭 암살을 시도, 귀와 목 부위에 총격을 가했지만 프릭은 목숨을 건졌다. 이 일로 버크맨은 22년형을 받고 14년간 형무소생활을 했다.
홈스테드 노사분규 이후 프릭은 카네기와 사이가 벌어지게 되자 지분으로 3천만 달러 상당을 받고 최고경영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피츠버그의 윌리엄펜 호텔을 포함, 뉴욕의 프릭콜렉션 등의 부동산을 개발하였고 진귀한 초상화 등 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는 70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미국경제는 그의 일생동안 40배 성장했다. 영국경제의 1/3 밖에 안 되었던 미국경제는 영국경제의 3배로 커지는 계기가 되었고 철도길이는 7,635 마일에서 25만3천마일로 늘어났다. 또한 미국인구는 2,300만에서 1억5백만 명으로 급증, 미국경제가 세계를 이끌어가는 초기시대에 생을 마감했다.
그는 유서에 150 에이커의 토지를 피츠버그시 공원 용도로 헌납하고 2백만 달러의 기금으로 운영하게 하였다. 그의 이름을 딴 프릭공원은 1927년 문을 열었고 그 후 후손들은 600 에이커의 부지를 추가 매입, 공원을 크게 확장시켰다. 또한 후손들은 1990년 프릭미술역사관(Frick Art & Historical Center)을 개관했다.

<다음호에는 George Pull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