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인은 영(靈)을 중시해 영에 대한 형이상학이 형성되었는바 지금 영에 대한 연구를 새롭게 다시 시작한다 해도 결국 고대인들이 생각했던 영의 이론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의미는 고대이후 지금까지 영에 대한 연구는 공백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역설적으로 지금부터 2천년 전후에 형성되기 시작한 종교 때문이었다. 종교는 영을 독점했으며 국토분단처럼 성령(聖靈)과 악령(惡靈)으로 갈라놓았다. 그리고 영에 구원이란 조건을 붙였으며 구원의 선택은 신이 가졌다는 이론을 만들어 결국 내 영의 소유자는 신이라 인간과 점점 멀어지고 말았다.
이러한 종교의 조류는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극락에 입성하기위해서는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잃어버려야한다는 무위자연(無爲自然)사상 속에 살아 영이 자유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런 행위를 오히려 도(道)를 깨우치는 방법으로 알고 있었다. 이러한 취지로 가끔 기(氣)나 참선(參禪)수련을 통해 내부에 영이 도출되어 초능력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이를 깨달음이라 할 수 없다.
이와 같이 동양과 서양은 영(靈)을 잃은 암흑의 세월 속에 살아왔고 아직도 진정한 영이 무엇인지 모르는 실정이다. 그러면 영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과학이 영을 직접 연구하지는 않지만 자연섭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깊이 연구하면 할수록 영의 세계가 간접적으로 나타나고 그 실체가 나 자신이고 우주의 본질이라는 암시를 받기 때문이다.
실례로 우리 인체의 세포활동만 관찰해 봐도 막강한 제3의 존재가 관리하고 있음을 암시 받는다. 예를 들면 세포 하나가 천수를 다해 더 이상 정상활동을 수행할 수 없으면 자신의 임종을 두뇌에 알리고 마지막 남은 효소를 터트려 자살을 감행한다. 통고를 받은 뇌세포는 죽은 세포가 부식해 주위 세포로 번지기 전에 신속하게 장사세포Undertake cell를 특파해 끄집어낸다. 세포 임종 하나만 관찰해도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이렇게 세포 하나하나가 개성을 갖고 자기 의지로 변화에 대응하며 살아가고 있으며 이를 위해 긴밀한 협조와 관리를 하는 뇌세포 하나하나가 대형 컴퓨터기능을 지녔다고 한다.
그러면 이렇게 활동하는 세포로 구성된 우리 신체는 얼마나 많은 세포로 이뤄졌을까? 현 세계인구에 1만 배 정도인 무려 60조 개나 된다. 1초에 세포 하나씩 센다 해도 360만년의 시간이 소요된다. 하지만 우리 의식은 단하나의 세포도 관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방대한 조직체가 통솔하는 존재도 없이 자율적으로 진행될 수 있을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조직을 관리하는 어떤 존재가 있음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으나 과학은 그 존재를 찾을 수 없다. 단지 막연하게 잠재의식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고 믿고 있을 뿐이다.
잠재의식인 영이 이러한 광대한 조직을 통솔하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에 의식과 결합하면 종종 초능력을 보이기도 한다. 영의 존재를 양자물리학 측면에서 보면 더 강한 암시를 받는다. 우리 신체를 구성하는 최소단위인 원자를 지구크기만 하게 확대했을 경우 물질인 전자나 양자는 테니스공만 해 실제로 원자는 빈공간이나 다름없다. 그나마 전자나 양자물질은 새로운 물질로 시시각각 바뀌고 만다. 다시 말해 작년에 나를 구성하고 있던 원자는 하나도 없고 새로운 원자로 교체된 것이다. 이는 마치 지금 있는 손톱이 작년 것과 동일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닌 경우와 같다하겠다.
신체기준으로 보았을 때 내가 존재한다고도 볼 수도 있고 없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이론이 양자물리학에서 말하는 불확실성의 원리다. 즉 우주라는 시공간 속에 물질기준의 나의 존재는 없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영만이 보이지 않는 나의 실체인 것이다.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우리는 영에 대한 연구를 조건 없이 있는 그대로 다시 시작해야 비로소 수없이 방황하는 영들이 제자리를 찾게 되고 자아(自我)를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400년 전 인간은 무언가 생각하는 능력을 지니고 태어났다는 데카르트의 관찰이 옳았으며 그는 다음과 같이 한마디로 요약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여기서 ‘생각’은 바로 영(靈)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