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스파이들(2) 켄지 도이하라(추가편)

죽는 순간까지 "일왕에 충성"



  • 캐나다 한국일보 (editor@koreatimes.net) --
  • 14 Jun 2019

이런 충복 둔 일본 조선 신하는 나라 팔아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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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승진과 나락의 끝…전범으로 사형 

켄지는 보직 관리에도 철저했다.

 

첩보 분야에만 머물러 있으면 직업 군인으로서의 성공가도에 한계가 있다는 판단에 따라 그는 일선 전투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도조 히데키(1941년 내각총리대신에 오름) 등 군내 강력한 후견자들의 도움으로 그는 제5사단 9여단장, 제14사단장, 제5군 사령관 등 중국 파견군 주요 부대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1940년 켄지는 대장으로 승진, 군사정책을 관장하는 군사참의관이 됐다. 곧이어 그는 본국으로 돌아가 육군 항공총감과 육군사관학교장 등을 거쳤다. 항공총감 시절 그는 미국의 참전을 유발한 진주만 공습에도 관여했다.

1943년 그는 본토 동부지역 방어를 책임진 동부군사령관으로, 이어 이듬해에는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을 관할하는 제7 방면군 사령관으로 영전했다.
태평양 지역에서 일본 수비군이 잇따라 패배하고 일본 본토에 대한 연합군의 상륙이 임박하자 켄지는 1945년 최고지휘부인 대본영의 지시에 따라 귀국, 교육총감과 제12 방면 군사령관에 취임했다. 수도 도쿄를 포함한 본토 주요 지역에 대한 연합군의 상륙 저지용 부대였다.
켄지는 곧이어 도쿄 등 간토(關東) 지역 방어를 담당한 제1 총군 사령관으로 취임해 종전을 맞았고

그는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체포돼 A급 전범으로 기소됐다. 기소장에는 그의 범죄 행위가 워낙 많았지만 이중 가장 심각한 것이 아편 거래 주도 혐의였다. 중국인들을 아편에 중독시켜 스파이로 만든 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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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그에 대해 강력한 처벌을 주장했다. 그는 사형선고를 받고 1948년 12월23일 교수형을 당했다. 죽기 직전 그가 남긴 시구는 "...하늘로 올라가는 혼백은 천황을 위해 천대까지 호위할 것"이었다. 켄지는 마지막까지 일왕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지 않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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