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오피니언
바보 노무현, 바보 김부겸
- 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editorial@koreatimes.net)
- Sep 03 2020 03:56 PM
손호철 | 서강대 명예교수
민주화 이후 치러진 첫 총선인 1988년, 부산의 한 무명 변호사가 정계에 입문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그는 5공청문회에서 곧 스타로 떠올랐다. 영광도 잠시, 그는 고난의 길에 들어간다. 자신을 정치로 이끈 대부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0년 독재세력과 3당통합을 한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을 따라가지 않았고 이후 김 전 대통령의 텃밭인 부산에서 계속 낙선해야 했다. 그러다가 1998년 종로 보궐선거에서 어렵게 당선, 여의도로 돌아왔다.
그러나 2000년 종로를 버리고 적지인 부산으로 내려가 낙방했다. ‘바보 노무현’ 의 신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이 신화의 덕으로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로 비약할 수 있었다. 이 대선에서 노 전 대통령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혔다. 경쟁자인 이회창 측에서 노 전 대통령 장인의 좌익경력을 시비 걸고 나온 것이다. 노 대통령은 이에 “그럼 아내와 이혼해야 한다는 것이냐”고 반박했다. 이는 사람들의 가슴을 움직였고 결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노 전 대통령은 정치적 대부인 김영삼 전 대통령만 따라가지 않은 것이 아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2년 대선 패배 후 정계를 은퇴했다가 1995년 정계 복귀하며 새정치국민회의라는 당을 만들어 야당을 분열시키자, 그는 개혁적인 소장의원들과 같이 이 당을 따라가지 않고 ‘꼬마민주당’을 지키다가 낙선한 뒤 소장 정치인들과 때를 잘못 만난 ‘여름 난로, 겨울 부채’라는 의미의 ‘하로동선(夏爐冬扇)’이라는 고깃집을 했다. 이때 같이 했던동지 중 한 명이 김부겸 전 행정안전부 장관이다.
일찍이 스타의 길을 걸었던 노 전 대통령과 달리, 김 전 장관은 원내 진출을 못 하고 고생하다가 2000년 경기도 군포에서 승리해 금배지를 달았다. 일단 원내 진출을 하자, 그는 탄탄한 의정활동과 지역구 관리로 3선의원이 됐다. 그러나 2012년 자신의 선거구를 던져 버리고 부산 이상으로 보수의 아성인 대구로 내려갔다. 그 결과는 낙선이었다. ‘바보 노무현’에 이어 ‘바보 김부겸’이 탄생한 것이다. 그는 실망하지 않고 대구를 지켰고 대구시장 선거에서도 떨어졌지만, 세 번째 도전인 2016년 총선에서 드디어 승리했다. 그것도 경기도지사를 지낸 거물 정치인 김문수를 누르고 말이다. 노 전 대통령도 넘지 못한 지역주의의 벽을 그는 넘어선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박근혜 탄핵에 따른 대구의 방어적 분위기와 거물 정치인 표적 공천을 이기지 못하고 이번에는 낙방하고 말았다.
대신 그는 더불어민주당 당권에 도전했는데 이번에도 노 전 대통령과 비슷한 상황에 부딪혔다. 그의 경쟁자들의 지지자들이 그의 처남이 운동권에서 뉴라이트로 전향해 논쟁적인 ‘반일종족주의’ 라는 책을 쓴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라는 사실을 시비 걸고 나선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이 대선에서 친척의 사상으로 시비를 당한 뒤 18년 만에 김 전 장관 역시 똑같은 시비를 당하고 있다. 충격적인 것은 2002년 대선에서 노 전 대통령을 공격한 것은 반대정당이자 보수 진영이었다면, 이번 공격은 오히려 같은 당, 특히 노 전 대통령의 정신을 이어 받은 ‘민주개혁 정당’지지자, 노 전 대통령의 지지자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좌파에 대한 연좌제는 틀린 것이지만, 우파에 대한 연좌제는 괜찮다는 것인가?
노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노전 대통령을 모독하는 것이다. 김 전 장관은 노 전 대통령처럼 “이혼하란 말이냐”라고 반발하고 있지만, 반향이 18년 전 같지 않은 것 같다. 이를 바라보며, 우리의 정치가 어느 면에서는 2002년보다 오히려 후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바보 김부겸의 실험이 과연 노 전 대통령처럼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을까?
www.koreatimes.net/오피니언
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editorial@koreatime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