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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은 테러의 종교인가
- 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editorial@koreatimes.net)
- Nov 02 2020 05:23 PM
이주화 | 한국이슬람교 서울중앙성원 이맘
선지자 무함마드를 풍자한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의 만평과 관련하여 파리 인근에서 발생한 중학교 역사교사 살해 사건은 이슬람을 또다시 테러의 종교로 각인시켰다. ‘지하드’를 외치며 자행된 잔인한 테러행위는 많은 사람들에게 아픔과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종교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저지른 테러는 교리적 가르침도 아니며 어떤 명분도 법적 근거도 찾을 수 없다. 이슬람을 비롯한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종교도 상식에 벗어난 비이성적 행위를 용인할 수 없으며, 만일 이를 용인한다면 그 순간 종교로서 가치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또한 맹목적이고 비 인륜적인 범죄행위를 종교의 가르침으로 알고 이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진정한 믿음을 가진 신앙인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슬람 경전 꾸란에는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가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 누군가 지상에 어떤 해악도 끼치지 않는 선한 한 사람을 살해하는 것은 모든 사람을 살해하는 것과 같으며, 그리고 누군가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은 인류 전체를 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라….” (꾸란5장32절)
이러한 꾸란의 가르침에 기초한 ‘지하드(Jihad, 聖戰)’의 진정한 의미는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지하드는 ‘노력하는 것, 애쓰는 것, 열심히 일하는 것’ 등의 언어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종교적으로는 그 의미를 세 가지로 구분하여 이해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신앙실천을 위한 자기 자신과의 끊임없는 투쟁(Jihad An-Nafsi)을 말하며 이를 가장 숭고한 지하드로 가르친다. 지하드의 꽃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것은 스스로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행하는 모든 정신적 노력과 희생을 의미하며 어떻게 그리고 얼마만큼 노력하였는가에 따라 그 깊이를 달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박한 일정 속에서 하루 다섯 번의 의무 예배를 근행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 허용된 음식, 허용된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모든 것이 여기에 해당된다.
두 번째는 자신의 재산으로 행하는 지하드(Jihad Al-Mal)인데 이것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으로 지하드를 행하는 것을 말한다. 주변의 불쌍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거나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물질적 지원이 이에 속한다. 마지막 세 번째는 몸으로 하는 지하드(Jihad Al-Badan)로 자신이 직접 참석하여 신앙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것을 말한다. 이 지하드는 개인의 생각이나 판단에 의해 임의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슬람 공동체의 결정에 의해 이루어진다. 무슬림들은 이러한 세 가지의 지하드를 일상의 삶에서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고 자신이 처한 현실적 어려움이나 고통을 이유로 멀어질 수 있는 신앙적 삶을 다잡기 위하여 지하드라는 이름으로 최선을 다한다.
이슬람이라는 말에는 ‘평화(Salam)’ 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리고 무슬림들은 매일 나누는 인사를 통해서 무슬림뿐만 아니라 비무슬림에게도 평화를 전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에 대한 오래된 이미지는 ‘한 손에는 꾸란, 한 손에는 칼’ 로 상징되는 과격한 모습이다. 그러나 꾸란은 “너희 주님이 원하시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게 될 것인데 너희는 어찌하여 사람들을 강요해서 믿음을 갖게 하려 드는가”(꾸란10장99절) 라고 해서 믿음은 결코 강요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가르친다. ‘한 손에는 꾸란, 한 손에는 칼’ 이란 말은 13세기 중엽 십자군 원정이 최후의 패배를 앞두고 있을 때, 이슬람에 대한 공포증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이탈리아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지어낸 말이라고 한다.
어떤 종교든 믿음을 강요하고 또 그 종교가 무력과 폭력으로 비춰진다면 대중적 호응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오늘날처럼 인간들의 삶이 물질만능에 의해 상업화되고 고도로 발달된 정보화 시대에서 이성적이지 못한 종교는 더더욱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쇠퇴할 수밖에 없다. 무슬림들은 하루 다섯 번씩 근행하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을 성찰하며 내면으로부터 생겨나는 각종 탐욕과 오만함을 비우고 순수함 그 자체로 스스로를 참 신앙의 가르침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투쟁하며 하루하루를 영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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