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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도로 따라 예술인 기행 통영 산양읍(상)
- 미디어2 (web@koreatimes.net)
- Feb 03 2021 09:12 PM
김춘수 박경리 윤이상 전혁림, 거장을 키운 바로 그 바다

▲ 통영국제음악당에서 본 일출 풍경. 올망졸망한 섬들 사이로 해가 뜨는 풍경은 망망대해 동해의 일출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맑고 풍성한 통영 바다는 걸출한 예술인을 배출한 자양분이었다.
통영은 조선 선조 때 설치한 ‘삼도수군통제영’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인근 고성의 변방이었던 어촌마을이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조선 수군의 거점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지금의 통영을 군사도시로 여기는 이들은 많지 않다. 오히려 근현대를 관통하며 걸출한 음악가 소설가 시인 미술가를 배출한 예향의 이미지가 강하다. 통영 출신 소설가 박경리는 예견이라도 한 듯 ‘토지’에 그 이유를 풀어놓았다.
“전쟁이 끝나자 각처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귀향을 서둘렀겠지만 해류 관계인지 천하일미를 자랑하는 해산물이며, 아름다운 풍광, 온화한 기후, 넘실대는 바다, 아득한 저편에 대한 동경, 그러한 생활의 터전을 사랑했을 감성 풍부한 장인들과 자유인들이 잔류했을 가능성은 충분하고 상상키 어렵지 않다. 그들이야말로 남쪽 끝머리 새로운 모습으로 떠오른 통영의 주역들이며 뿌리가 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 남쪽 끝머리에서 한 발 더 내려간 곳, 미륵도를 한 바퀴 돌면 바다만큼 풍성한 통영의 예술인과 만난다.

▲ 통영 봉수골의 전혁림미술관. 화가가 30여년간 살았던 터에 지은 미술관은 타일 벽화로 외벽을 장식해 그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다.
전혁림의 코발트블루, 김춘수의 꽃
통영항과 좁은 바다(이곳에선 ‘강구안’이라 부른다)를 사이에 둔 미륵도는 섬이면서 섬이 아니다. 원래 통영반도와 연결돼 썰물 때에는 걸어서 건널 수 있었고, 밀물 때는 폭 200여m의 바닷길이 물에 잠기는 지형이었다. 이 물길을 확장해 1932년 지금의 통영운하가 만들어졌고, 그 아래에는 해저터널이 건설됐다. 지금은 좁은 물목을 가로지르는 충무교와 통영대교, 2개의 다리로 연결된다. 현재 섬의 북쪽 일부는 시내권역에 포함되고, 나머지는 산양읍으로 구분된다.
통영대교를 건너 첫 번째 삼거리에 이르면 정면 콘크리트 옹벽에 대형 타일벽화가 눈길을 잡는다. 여느 도시의 흔한 벽화 장식이 아니다. 현대미술의 거장 전혁림(1915~2010) 화백의 ‘풍어제’를 가로 30m, 세로 9m의 타일벽화로 재현한 작품이다. 하얀 바탕에 진한 원색과 부드러운 파스텔 색상이 가미된 경쾌한 그림이다. 원과 직선이 교차하는 공간에 갯마을의 풍요로움과 깊은 바다의 자유로움이 어우러져 있다. 그러고 보니 다리 오른쪽 고층 아파트 외벽에도 비슷한 풍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삼거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전혁림미술관이 있다. 본인이 30여년간 생활하던 사택을 허물고 바다와 등대, 전통 사찰의 핵심인 탑의 형상을 접목해 신축했다. 그의 작품을 타일에 옮겨 외벽을 장식해 건물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다. 특히 3층 외벽은 화백의 1998년작 ‘창(Window)’을 재구성하고 11종의 도자기 작품을 조합한 대형 벽화 작품이다.
전혁림은 미술전문학교 문턱에도 가 보지 않았고 통영수산학교를 졸업한 후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하며 한국 화단의 거목으로 우뚝 선 인물이다. 학연이 없으니 서울을 중심으로 한 화단과는 거리를 두고 고향에서 묵묵히 자신만의 독특한 색채와 화풍을 쌓았다. 그의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코발트블루는 맑고 투명하고 풍성하기까지 한 통영 바다에 대한 자부심이자 찬사다.
전혁림은 생전에 ‘코발트블루를 정확하게 말하자면 쪽빛 한 술에 청색 잉크 한 방울 떨어뜨리면 일어나는 번짐의 가장자리 색’이라고 표현했다. 전혁림을 ‘통영의 피카소’라 부르는 것은 통영을 ‘한국의 나폴리’에 비유하는 것만큼이나 허무하다. 통영 바다 자체가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브랜드이니 ‘통영 화가 전혁림’이면 충분하다.

▲ 전혁림미술관 앞에 위치한 북카페 ‘봄날의 책방’ 외벽에 통영 출신 예술가들의 캐리커처가 그려져 있다.
미술관이 위치한 봉수로 일대는 조용히 통영의 문화 아지트로 변신하고 있다. 미술관 바로 뒤에는 지역 출판사인 ‘남해의봄날’이 자리 잡았다. 홈페이지에 ‘모든 서비스가 집중된 서울과 수도권을 떠나 양질의 문화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지역의 이웃들을 돕고, 남해안의 풍부한 자연 자원과 문화예술 콘텐츠를 많은 사람들과 나누겠다’는 포부를 당당히 내걸고 있다.
같은 골목에 있는 북카페 ‘봄날의책방’ 외벽에는 김춘수 유치환 박경리 윤이상 백석 등 통영 출신이거나 통영과 인연이 깊은 예술가의 캐리커처가 그려져 있다. 보기만 해도 배부른 풍경이다. 이곳에서 미륵산 자락 용화사에 이르는 봉수골에는 ‘내성적 싸롱 호심’ ‘릴리봉봉’ 등 전혁림의 작품처럼 세련되고 예술적 감성을 입은 카페와 식당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미술관에서 약 1㎞를 내려오면 강구안 바닷가에 ‘꽃’의 시인 ‘김춘수유품전시관’이 있다. 4층 건물 중 2개 층에 시인과 통영의 관계, 생전의 수상 목록과 육필 원고, 집필 유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관은 각이 지고 딱딱한 관공서처럼 보여 사물의 존재론적 세계를 집요하게 탐구한 시인의 인생을 담는 공간으로 썩 어울린다고 보기 힘들다. 작품과 유품을 단조롭게 나열한 내부 전시도 아쉬움이 남는다.
김춘수(1922~2004)는 동시대 지역 예술인으로 전혁림과도 각별한 사이였던 모양이다. 사후 출판된 시집 ‘꽃인 듯 눈물인 듯’에서 전혁림은 “김시백(詩伯)은 블루를 무척 좋아했다. 나를 비롯한 김시백은 바다와 연하여 형성된 포구를 지척에 두고 성장했고, 사계절이 가져다준 바다의 풍부한 변화는 나의 작품 세계뿐만 아니라 그의 초기 문학의 근간에 아주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으리라 믿는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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