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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레지스탕스들 (하)
2차대전 나치 점령군에 대항하다
- 미디어2 (web@koreatimes.net)
- Feb 09 2021 08:44 PM
▲ 41년 코밋 라인을 구축하고 43년 1월 체포될 때까지 운영을 총괄한 벨기에 간호사 출신 레지스탕스 앙드레 더용. 그는 포로수용소에서 종전을 맞이했고, 전후 아프리카에서 의료봉사 활동가로 일했다. 사진은 전후 영국 왕실 훈장(George Medal)을 받았을 때.
간호사 출신인 더용은 41년 8월 은밀히 동지를 규합해, 추락한 연합군 비행기 조종사를 구출해 숨겨주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의 롤모델은 1차대전 연합군 낙오병들을 구조해 당시 중립국 네덜란드로 피신시킨 영국 출신 간호사 이디스 카벨(Edith Cavell, 1865~1915)이었다. 인도주의자였던 카벨은 벨기에 종군 간호사로 일하며 피아 불문 부상병을 간호했고, 연합군 병사 약 200명을 탈출시킨 사실이 발각돼 독일군에 의해 총살 당했다.
더용의 짐은 카벨의 것보다 훨씬 무거웠다. 가까운 네덜란드를 포함해 대륙 전역이 나치 수중에 있었다. 유일한 탈출 경로는 프랑스를 종단해서 국경과 스페인 피레네 산맥을 넘는 거였다. 극우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도 전쟁에만 불참했을 뿐 노골적인 친나치였고, 스페인 국경 경비대와 헌병은 나치 못지않게 연합군 피신자들을 색출하는 데 혈안이었다. 하지만 수도 마드리드에는 영-미 대사관이 있었고, 반도 최남단 지브롤터(Gibraltar)는 영국의 해외 영토였다.
더용의 난제, 즉 코밋 라인의 파리 이남 루트를 완성시킨 건 ‘더흐레이프 일가(전호 참조)’였다. 더 엄밀히 말하면 자닌의 어머니이자 코밋 라인의 남부 책임자 엘비어(Elvire de Greef, 1897~1991)였다. 수도 브뤼셀의 유력 리버럴 일간지(L’Indépendance Belge) 기자였던 엘비어는 1940년 5월 벨기에가 나치에 점령당하자 직원용 피난 버스로 가족과 함께 프랑스 남부 최남단 바스크 지방의 앙글레로 피신했다. 이미 국경이 막혀 영국으로 떠나려던 계획은 무산됐다.
하지만 일찌감치 레지스탕스 활동에 동참할 의지가 있던 엘비어는 브뤼셀의 한 지인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며 암호를 남겼다. 그 암호가 ‘Is Go dead?’였고, ‘Go’는 더흐레이프 일가의 반려견 이름이었다. 더용의 요청에 응해 코밋 라인 남부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그가 쓴 코드네임은 ‘탕 고(Tante Go, 고 아주머니)’였다.
밀수를 부업 삼은
여성 레지스탕스들
엘비어는 전시 국경 바스크 지방의 가장 ‘알찬’ 일자리였다는 밀수-암거래 시장에 뛰어들어, 빼어난 수완과 전시 영국 정보국(MI9)이 코밋 라인에 지원한 자금으로 금세 자리를 잡았다. 밀수 루트는 피신자들의 월경(越境) 루트였고, 피레네 산맥과 골짜기를 손바닥처럼 꿰고 있던 밀수꾼들은 노련한 가이드였다. 물론 그들은 넉넉한 보수를 받았다. 엘비어는 “패전국의 시민이 된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던”지역 주민들을 포섭, 파일럿들이 월경 전 머물 수 있는 안전 가옥 네트워크를 꾸려 운영하기도 했다.
전쟁 전 사업가로 일하며 여러 언어를 익힌 자닌의 아버지 페르난드(Fernand, 암호명 Oncle Dick)는 바스크 나치 주둔군 통역사 및 번역가로 취업해, 신분증과 통행증 용지를 훔치고 정보를 수집했다. 그림 솜씨가 빼어났던 자닌의 오빠 프레디(Frederick, 1923~1969)는 빈 용지에 사진을 붙이고 직인을 위조하는 임무를 도맡았고, 때로는 가이드로도 활동했다. 저 모든 일의 리더가 엘비어였다. 엘비어는 밀수-암시장에서 알게 된 나치 장교들로부터 정보도 훔치고, 그들의 비리 약점을 고삐처럼 쥐고 적잖은 도움을 받아내기도 했다. 그가 “부적절한 시간에 부적절한 장소에” 있다가 검문을 당해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이었다. 나치에게 그는 밀수 동업자였다.
더흐레이프 일가는 아무도 체포되거나 희생되지 않았다. 일가는 약 320여 명의 연합군 파일럿을 구출했고, 그들 다수는 다시 전투-폭격기를 몰고 전선에 나섰다.
일가의 막내 자닌은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하기까지 약 3년 간 기차와 전철, 자전거, 도보로 30여 차례 '코밋 라인'을 왕복했다. 앙글레 안가에서 스페인 국경까지 마지막 구간은 약 25km. 자닌은 적게는 두 명, 많게는 대여섯 명의 도망병들과 도보나 자전거로 가이드 접선장소까지 이동해야 했고, 병사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들이 떠나고 난 뒤 남겨진 자전거들을 숨기거나 도로 가져오는 일이 무척 위험한 일이었다.
더용은 42년 1월 동료의 밀고로 나치에 체포돼 고문 끝에 자신이 ‘코밋 라인’의 총책임자라고 실토했지만, ‘너무 젊은 여자여서’게슈타포 장교가 그 자백을 못 믿은 덕에 포로수용소에서 무사히 종전을 맞이했다. 전후 그는 아프리카 콩고와 카메룬 등지의 나병 병원에서 간호사로 봉사했다.
신변 노출 위험이 커지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코밋 라인 활동도 44년 말 끝이 났다. 노르망디 D-데이 당일, 스페인을 거쳐 영국으로 도피했던 자닌 남매는 벨기에 탈환 직후 귀국했고, 종전 후 벨기에와 영-미, 프랑스 정부의 여러 훈장과 메달을 받았다. 전시 영국 정보국 MI9에 관한 책을 쓴 영국 사학자 헨리 프라이(Henry Fry)는 자닌을 “민간 비밀 군대의 필수요원”이자 “핵심 활동가(key figure)”였다고 소개했다.
코밋 라인 활동가 중 700여 명이 나치에 체포돼 250여 명이 처형되거나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다. 대다수 여성이었다.
전후 자닌은 벨기에 주재 영국대사관 상무관으로 일했다. 평생 독신이었던 그는 신앙이 아닌 학문으로서 여러 종교를 공부하며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했고, 말년에는 브뤼셀 집 인근 길 고양이 먹이 주는 일을 낙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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