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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 현장서 벗어나며 “연료없다” SOS
- 미디어2 (web@koreatimes.net)
- Feb 08 2021 09:11 PM
제2원폭 실은 ‘박스카’ 태평양에 추락할뻔 5분간의 횡단비행에서 목표물 경마장 발견 티니안까지 못가고 오키나와에 간신히 착륙
노스필드, 티니안, 마리아나 섬
1945년 8월9일 오전 10시 30분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던 미군 폭격기 조종사 찰스 스위니와 대원들.
조종간을 단단히 잡은 스위니는 기수를 남서쪽으로 돌려 95마일 떨어진 나가사키를 향했다.
갑자기 큰 각도로 획 돌렸기 때문에 뒤따라오던 더그레이트 아티스트 기와 공중 충돌할 뻔했다. 아티스트 기는 원폭 폭파 장면을 영상 기록하기 위해서 열심히 따라오는 중이었다. 스위니는 만일 귀로에 450마일 밖의 오키나와에 원폭을 떨군다면 그의 비행기는 오키나와 상공을 단 한 번 날 수 있는 연료만 남았다. 그는 더욱 신경질이 났다. 사실 그것조차 마음놓을 수 없는정도였다. 아무래도 원폭을 떨어뜨린 후 박스카를 태평양에 추락시켜야 할 것으로 생각됐다. 그의 마음은 무거웠다.
나가사키는 로맨스가 있는 도시다. 16세기 서양인으로는 처음으로 포르투칼 선원들이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도착했다. 유럽인들이 이 도시를 좋아해서 이탈리아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는 오페라 ‘나비부인(Madama Butterfly)’을 여기 배경으로 작곡했다.
그러나 지금은 대 연합국 전쟁을 크게 지원하는 중요 항구였다. 그뿐 아니라 미쓰비시강철 및 무기 제조회사, 어뢰제조 미쓰비시-우라카미 회사가 있다.
스위니는 2만8천피트 상공에서 하강을 시작했다. 나가사키 역시 코쿠라처럼 구름이 짙어서 아래가 잘 보이지 않았다. 박스카의 폭탄관리책임자 커밋 비한 대위는 도시 상공을 단 한번 날아가는 5분 사이에 레이더로 목표물을 찾겠다고 마음먹었다. 코쿠라에서 처럼 목표지점을 못 찾으면 큰 일이었다. 명령은 목측 낙하였으므로 명령무시의 행동이었다. 그 5분 사이, “찾았다” 비한이 갑자기 소리쳤다.
그는 구름사이로 경마장을 발견한 것이다. 틀림없는 경마장이고 바로 목표물이었다. 그는 즉시 레이더에서 목측폭격으로 작동을 바꿨다. 박스카의 속도는 시속 2백 마일임을 감안, 45초 후 비한 대위는 목표물을 다시 확인하고 팻맨을 떨구는 버튼을 눌렀다. “폭탄이 떨어졌다”고 그는 소리쳤다. 까만 5톤 무게의 원자폭탄은 박스카 뱃속을 벗어나 지상으로 향했다. 폭발하기까지는 43초. 스위니는 박스카를 긴급 하강시키면서 오른쪽으로 급커브를 돌아 피어오르는 버섯구름을 피해 꽁무니를 뺐다. 버섯구름은 위쪽이 더 넓고 세게 퍼지기 때문이다.
뒤에서는 아티스트 기가 따라왔다. 이번 폭발은 앞서 히로시마의 ‘리틀보이’보다 더 강력했다. 도합 5번 폭풍 같은 공기파도가 두 비행기를 따라잡아서 강력한 힘으로 때렸다. 스위니는 마치 전봇대로 얻어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때 폭격기는 둘 다 바다 위를 날고 있었다.
‘메이데이, 메이데이(구조해 달라)’ 침묵을 깨며 스위니는 “박스카에 문제가 발생했다”고 라디오로 말했다. 그는 근처에 있을 지 모르는 미군비행기나 함정에 연료가 바닥났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의 라디오 신호는 티니안 섬에서도 들렸다. 이 소리를 듣고 티니안에서는 그의 임무가 무산된 것이 아니며 박스카 승무원들이 살아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박스카로 오키나와까지 안전하게 날아가는 일은 스위니만 가능한 일이었다. 모든 구조활동은 박스카가 태평양에 추락한 것으로 알려졌을 때 중단됐다. 비행엔지니어 존 큐하렉 상사는 연료가 3백갤론만 남았으므로 딱 50마일 갈 것이 모자란다고 계산했다.
스위니와 모든 동료들은 1시간 동안 침묵으로 기도했다. 그들은 계산상 착오 가능성 없이 넓은 바다 위를 날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모든 승무원은 구명대를 차고 불시착에 대비했다. 스위니는 연료소비를 막기 위해서 프로펠라의 속도를 줄이고 고도를 조금씩 낮췄다. 이렇게 해서 중력이 속도를 유지해 주도록 유도했다. 대원들은 모두 물에 추락할 것을 예상했다.
박스카의 항해사 프렛 올리비 소위는 물이 차거울까 어떨까까지 생각했다. 상어떼가 몰려오면? 그는 생각을 멈췄다. 그런 사이 오키나와가 시야에 드디어 들어왔다. 미군이 이 섬을 점령한 후 2-3주간 비행장 활주로는 아주 붐볐다. 출격하는 폭격기 편대들이 활주로 진입로에서 죽 줄을 서서 이륙을 기다렸다.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마침 관제탑을 불렀는데 대답이 없자 스위니는 비행기 동체 밖으로 비상 신호탄을 쏘게 했다.
지상근무자들은 빨리 활주로를 비어놓으라는 뜻이었다. 다행히 활주로는 비어졌다. 박스카는 하오 1시51분 날아오면서 대충 조준하고 그대로 착륙을 시도했다. 속도가 높아서 동체는 활주로에 부딪친 후 25피트나 높이 튀어올랐다. 이때 4개의 엔진이 하나씩 꺼지기 시작했다. 연료가 공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위니는 마구 흔들리는 동체를 안정시키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 마침 화염폭탄을 잔뜩 싣고 이륙을 기다리는 B-24 폭격기들과 거의 부디칠 뻔했다. 만일 부딪쳤다면 그도, 승무원도 화염에 쌓여 다 죽었을 것이다.
드디어 박스카가 정지했다. 소방차와 앰뷸런스들이 앵앵거리면서 달려왔다. 첨단의 폭격기 B-29 ‘박스카’는 활주로에서 섰는데 갓길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만한 연료가 없었다. 아무도 박스카의 오키나와 착륙을 비행장에 알려주지 않았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티니안기지를 떠날 때부터 생긴 여러 말썽의 마지막 하나였다.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냐” 기지사령관 지미 두리틀 소장은 소리쳤다. 소장은 42년 도쿄를 최초로 폭격, 미군기의 본토폭격을 시작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509, 박스카입니다.” 스위는 대답했다. “우리는 방금 원자탄을 나가사키에 떨어뜨리고 왔습니다.” 그것은 아주 시의적절한 순간이었다. 2차대전에서 일본본토를 폭격한 최초의 장성이 이번 전쟁의 마지막 폭격자가 되기를 바라는 군인들을 만나는 순간이었다.
원폭 2호 팻맨의 파괴장면을 보지 못한 스위니 조종사는 “아마 우리는 목표물을 벗어난 것 같습니다”고 두리틀 장군에게 설명했다.
사실 팻맨은 목표지점을 벗어났다. 원폭은 미쓰비시 어뢰공장에서 2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떨어졌다. 그러나 그건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불기둥은 살아움직이는 것 같았다”고 아티스트 기에 탑승했던 뉴욕타임즈의 윌렴 로렌스 기자는 신문에서 기술했다.
“새로운 생물이 바로 우리 앞에서 태어난 것 같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불기둥은 마치 수천 개의 온천처럼 부글거렸고 하늘로 끓어올랐다.”
4만5천명의 남녀, 어린이, 노인들이 즉사했다. 6만명은 중상을 입었다. 다만 히로시마에서처럼 불 폭풍은 없었다. 팻맨이 우라카미 계곡의 가파르고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산기슭에 떨어져 폭발력이 밖으로 번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화상이나 사망자의 탄소화(숯덩이화)는 조금도 덜 하지 않았다.
수만명이 자기들의 가정과 사업체가 무너지면서 깔려 죽었다. 대부분 언덕배기에 만든 나가사키의 특별한 방공호들은 돌로된 통로들을 순식간에 화덕으로 변경시켜서 수백 명을 한꺼번에 소사시켰다. 도시 전체에서 화상자들은 수 마일씩 걸어가다가 쓸어져서 죽었다. 화상뿐 아니라 구토와 피가 섞인 설사로 1주일 안에 사망하기도 했다. 수많은 부상자들은 자기들의 피부가 노랗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수 주나 수개월 안에 방사능 독으로 죽었다. 시체를 묻을 장소가 없자 야외 넓은 땅에 화장시설을 임시로 만들어 시체들을 마구 쌓아 놓고 태웠다.
10살도 안되보이는 소년이 화장터로 다가왔다. 그는 등에 갓난 동생을 집어넣은 자루를 등에 매고 있었다. 머리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아기는 자는 듯 평화로왔다. 소년은 조심스럽게 등짐을 벗어서 아기를 꺼낸 다음 봉사자들에게 건넸다. 아기는 죽어 있었다. 아기가 석탄 불 위에서 타기 시작하자 소년은 군인처럼 차렷자세로 서서 입술을 꼭 깨물었다. 흐르는 눈물을 참았다.
그의 입 귀퉁이에선 피가 보였다. 동생이 화장됐음을 확인한 다음에야 그는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 [폭격 당시 나가사키 인구는 20만명. 폭격 8주후 통계는 14만 명 사망이었다. 한국인 노무자 중 사망자는 히로시마에서 2만명, 나가사키에서 2천명.165명은 2중 피폭자였다. 즉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폭 세례를 받았으나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다.
한국인 노무자 사망 히로시마 2만명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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