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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백악관의 딜레마
“포로는 노예, 생명이 없다. 전부 죽여라” 도조의 명령
- 미디어2 (web@koreatimes.net)
- Feb 24 2021 06:33 PM
콰이강의 다리 철로 건설에 미군 1만 2천, 양민 15만 사망 ‘일왕 존속’이 양보불가의 일본측 항복조건
백악관, 워싱톤DC
1945년 8월9일 상오 10시46분
▲ 미군 포로와 양민이 만든 콰이강의 다리.
일본군은 사병들의 성욕을 해소해야 사기가 높아진다고 믿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군인들은 많을 땐 20명이 한꺼번에 이른 아침부터 내 방에 몰려 왔다”고 또다른 위안부/성노예는 말했다.” 그들은 학교에서 어린 여자아이들을 납치했다. 이 애들의 성기는 아직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들은 무척 고통스러웠고 성병에 금방 감염됐다. 약이라고는 ‘아까징끼’(머큐로크롬)라고 하는 상처에 바르는 빨간 액체 구급약 뿐이었다. 아이들의 상처는 곪아들어가고 약이나 치료는 없고… 지옥이었다.
모든 컴포트 스테이션(Comfort Stations: 위안부가 있는 곳)이 빌딩이나 건물 안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군인들은 중국노무자들을 시켜 참호에 지푸라기를 깔고 아이들을 거기에 눕혔다. 침대는 물론 없으니 짚단 밑은 땅이 딱딱했다. 전기불은 없고 기름램프가 더러 있긴 했다. 어두운 밤 “엄마, 아파!”라고 울부짖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처절했다.
일본군 고위층은 군인들이 포로들을 목을치거나, 뭉쳐있는 곳에 불을 지르거나, 노예로, 때로는 그들의 인육을 먹으면서 살아남으면 그들을 표창했다. 야만행위를 조장 장려했다.
일본군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15만 명에 달하는 미국시민, 영국인, 네델란드 인들의 대부분은 굶는 것이 일상이었다. 병이나 상처 치료란 기대하지 못했다. 옷도 없고 거주 환경은 아주 더럽고 조악했다. 그러나 포로들의 탈출은 불가능했다.
정글에서 포로들은 1백명 단위로 조를 짜 대나무로 만든 임시건물에 수용됐다. 바닥은 진흙인데 인분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이질(고열, 구토, 심한 설사병)이 창궐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포로대우에 관한 제네바 국제협정을 전혀 무시했다.
포로들은 노예였다. 탄광에서, 공장이나 부두에서 노동자로 하루종일 일했고 또는 밭에 나가 농사일에 동원됐다. 이래서 버마-시암 연결 철로건설에서 미군등 연합군 1만2천명, 시민노동자는 무려 15만 명 이상이 피로와 병으로 죽었다. 250마일 길이의 악명높은 이 철로건설은 57년 영화 콰이강의 다리(The Bridge on the River Kwai)로 더욱 유명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도조 총리는 “포로들의 생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전부 죽여버려라”라는 정책을 유지했다. 미군이 입수한 문서는 구체적으로 이렇게 명시됐다 : 개별적 또는 집단으로 죽일 것. 집중포격으로, 독가스나 독물사용으로, 익사, 참수(목을 짜름) 등 상황에 따라 적합한 방법으로 처분하라. 어떤 일이 있어도 한 명이라도 도망가게 하면 안된다. 그럴 경우 남아있는 전부를 사살하라. 그리고 반드시 증거를 남기지 말라.
일본군은 팔라완 섬에 수용된 미군포로 150명을 집단 학살했다. 점차 다가오는 연합군에게 구조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포로들이 미군 폭격을 피해 방공호에 피신했을 때 일본군은 이 기회를 이용, 개솔린을 쏟아붓고 불을 질렀다. 불구덩이에서 뛰어나오는 포로들은 기관총 세례를 받았다. [한국이나 중국에서 자행한 만행과 똑같았다.] 이래서 139명이 죽었으나 11명이 정말 다행하게 목숨을 건져 일본군 잔학상태를 세상에 폭로할 수 있었다.
미군포로 2만7,465명 중 1만1천 여 명, 절반 이상이 이런 방식으로 죽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유럽전선에서는 독일군에게 잡힌 9만3,941명 중 불과 1천명만 죽고 거의 대부분인 9만2,820명이 살아서 돌아왔다.
일본은 태평양 전선에서 총 5백 개의 포로수용소를 운영했다. 이뿐이 아니다.
히로히토 일왕은 전쟁에서 가장 잔인하고 징글징글한 ‘731부대’의 설립을 승인했다. 이 부대는 인간 생체실험을 한다고 마취 없이 포로나 잡혀온 사람들의 팔 다리를 잘랐다. 피를 빼고 자동차 부동액을 대신 넣었으며 인체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좌우 정가운데를 세로로 짜르고 포르말린이 담긴 6피트 높이의 큰 유리병에 넣어서 보전했다. 흑사병이나 콜레라 균을 건강한 인체에 삽입해서 인체의 변화를 살폈다.
▲ 동상실험 중인 동상자의 손.
전선에 투입된 많은 일본의사들은 거의 모두 731부대를 통해서 치료법을 배웠다. 의사들은 포로 중 중상인데도 살아있거나 의식이 있으면 총으로 쏴죽였다. 마취없이 상처를 짜르고 꿰메고 치료했다. 이들은 전장터에서 원시적인 응급치료법을 731에서 배웠다. 이래서 중국인, 한국인 등 아시아 사람과 연합군 포로 수천 명이 실험대상이 돼서 목숨을 잃었다.
전쟁이 일본에 불리하게 돌아갈 때도 악랄한 실험은 계속됐다. 45년5월5일 미군 B-29 폭격기가 규슈 섬에 추락했다. 조종사가 심문받으러 끌려간 사이 나머지 승무원 10명은 후쿠오카에 있는 비밀 731실험실로 압송됐다. 이들은 인간 실험용 돼지(기니 픽)가 됐다. 사지를 절단 당하고 해부됐다. 10명 모두가 이렇게 처참하게 죽었다. 히로히토가 이같은 모든 실험을 승인한 탓이었다.
히로히토는 마침내 최고전략회의에서 자기 의견을 말할 준비를 마쳤다. 그가 입장하자 일본 최고위 인사들은 모두 일어나서 허리굽혀 절했다. 모두가 자리에 앉자 일왕은 말할 것을 생각하면서 순간적으로 감정이 북바쳤다. 그는 곧 자세를 추리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세계의 상황과 일본의 상태를 생각해보면… 전쟁을 계속한다는 것은 일본국의 철저한 파괴를 의미한다.” 일왕은 목소리는 작았지만 문장을 또박또박 끊어서 읽었다. 우아한 연설이라곤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감정이 도를 넘자 그는 울기 시작했다. 참석자들도 책상에 엎드려 흐느꼈다.
“내가 해외에 있는 충성스런 군인들, 또 전투 중 죽거나 부상 당한 병사들, 폭격으로 재산과 생명을 잃은 국민을 생각할 때, 이 모든 희생이 너무 슬프다.”
“나는 충성스럽고 용감한 병정들이 무장해제 당하는 것과 전쟁 책임자들이 벌을 받는 것을 참을 수 없다… 그래도 참지 않을 수 없다.”
[731부대 …. 한국인도 이들의 야만적 의료실험에 희생됐지만 거의 대부분은 중국인이었다. 기가 막히게도 도쿄에도 실험실이 있었다. 즉 만주에 주둔한 부대 실험실에서만 은밀하게 자행된 만행이 아니라는 것이다. 죽어서 실험실 밖에 묻힌 자들의 유해발굴은 2011년부터 시작됐다. 거의 70년 만의 발굴은 일본정부가 이 부대의 존재와 실험 자체를 모두 부인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진실이 파묻힌 또 다른 이유는 미국이 부대장 및 관계 고위층의 사면과 실험결과 제공을 교환조건으로 내걸었기 때문이다. 일본 점령사령관 맥아더가 이를 승인했다. 분통이 터진다.]
8월10일 새벽 6시30분 트루만대통령은 일본의 항복문서를 받았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 이후 워싱톤에는 일본대사관이 없기 때문에 그의 성명은 중립국 스위스대사관을 통해서 미국에 전달됐다.
“천황폐하의 존귀한 명령에 따라” 성명서는 이렇게 시작됐다. “일본정부는 45년7월26일 미국, 영국, 중국, 그리고 후에 서명한 러시아정부가 합동으로 발표한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인다.”
트루만이 주장한 ‘무조건 항복’에 못미치는 점은 없었다. 1년전 부통령에 지명되었다가 국제적으로 가장 결정적 시기에 대통령이 된 그는 사실상 이 분야의 전혀 새로운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예리하고 고집스러웠다. 그는 세계 전쟁을 종식하는 데는 몇 문장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독일이 5월에 항복한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사태는 좀 더 복잡했기 때문에 미국 군사력과 같은 강한 외교술이 필요했다. 그는 많은 어려운 결정들을 내렸다. 침착하면서도 목표가 뚜렸했다. 그가 지금 쥐고 있는 한 장의 종이는 대통령 취임 후 4개월간 가진 고민의 결정체였다.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했던가.
백악관 입성후 지난 날들이 그의 머리에서 파노라마 쳤다. “꿈은 아니지” 다짐하며 떨리는 음성으로 손에 든 종이를 다시 읽으면서 미국이 제시한 항복조건에 맞는가를 하나하나 살폈다.
문서는 그렇지 않음을 드러냈다. 일본은 포츠담 선언과 다른 한 문장을 항복조건에 덧붙였다. “이 성명은 일본천왕이 최고 통치자라는 조건이 절대 훼손되지 않는다는 상호이해 아래 …”
트루만은 이 같은 조건을 오랫동안 예상하면서 마음 한 구석에는 “그렇게 해주마”하고 있었다. 전쟁상 스팀슨 장관은 일본 전후 복구를 위해서는 일왕의 존속이 필요하다고 오래전부터 역설했다. 더글라스 맥아더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트루만은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우리가 쟁취하려한 ‘무조건 항복’ 조건에 ‘그러나’라는 일본측 단서가 붙는 것을 우리는 용납할 것인가.”
그는 후에 이렇게 기록했다. 이런 조건이 붙은 항복을 위해서 그 많은 인명 피해를 입으면서 우리는 싸웠던가. 최고 책임자 일왕을 그대로 두면서 종전한다? 그의 마음은 무거웠다. 대통령은 금요일 하오2시 장관회의를 예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서 관계자 긴급회의를 비상소집했다.
참석자들의 의견은 갈렸다. 국무장관 번즈는 무조건 관철해야 한다고, 전쟁장관 스팀슨은 일본조건의 수용을 원했다. 앞으로 원자탄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고 마음을 정한 트루만은 양쪽 의견을 주의 깊게 들었다. 해군장관 포레스탈은 포츠담 선언이 제시한 항복조건에 일본항복을 수용해야만 할 구멍이 있을 지 모른다고 주의시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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