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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 하루 전날도 버티다
미국은 8월14일에도 도쿄 대공습 “항복해라” 압력
- 미디어2 (web@koreatimes.net)
- Mar 02 2021 07:24 PM
러시아군은 만주서 파죽지세로 내려오고 식량 떨어져 아사직전 관동군은 탱크도 대포도 없다
중국 만주
1945년 8월 13일 오후
트루만은 일본에 답장하라고 명령했다 : ‘히로히토는 그대로 존속한다. 그러나 전쟁범죄 재판에서 면책되지는 않는다.’ 대통령은 그날밤 일기에 ‘책상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일본 항복제안에 대해서 의논했다’고 적었다. “우리 조건은 ‘무조건’인데 그들은 항복에 토를 달았다. 그들은 군주제의 존속을 원했다. 우리는 그 방안에 대해서 후에 말하겠으나 조건은 우리가 정한다.’ 트루만은 조그만 허점도 없이 철저하게 챙겼다.
메시지는 스위스를 거쳐 도쿄로 전해졌다.
“일본정부는 포츠담선언을 수락한다면서 ‘연합국이 주권을 가진 지배자인 일왕의 권한을 절대로 손상시키지 않는다고 우리는 이해한다’는 조항을 포함했다.
이 점에 대해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항복하는 순간부터 일왕의 권위와 일본정부의 통치는 연합군 최고사령관에 귀속된다. 최고사령관은 항복조건을 구현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
미국측 답장은 일왕문제는 점령군 최고사령관이 정하는 것이지 당신들이 왈가왈부할 것이 아님을 단호하고 분명하게 전했다. 일본으로부터는 아무 반응이 없는 가운데 하루가 지났다. 또 하루, 하루가 지나면서 트루만은 슬슬 분노가 끓어올랐다.
만주주둔 일본군(관동군)은 코너에 몰렸다. 도쿄에서 6백마일 지점, 수풀이 우거진 언덕 아래서 제5군은 몰려오는 러시아 군에 마지막 방어망을 구축했다. 일군은 러시아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러시아군26만명 대 일본 6만명. 군인 수로 보면 거의 4대 1. 뿐만 아니라 러시아는 야포와 로켓발사기 4천 대를 가졌다. 일본은 불과 1백 여 대 뿐.
러시아는 자체적으로 만든 타이거 탱크와 미국서 빌려온 셔만 탱크를 가졌으나 일본군은 탱크가 1대도 없었다. (미국은 러시아에 셔만 탱크 5백대, 마른 음식재료 1백만톤, 휘발유 20만톤을 주었다. 모두 만주침략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미국에 만주쪽의 정보를 일체 주지 않았다.)
일본군이 무기보다 더 곤란을 겪는 것은 군대가 아사직전이라는 점이었다. 식량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가진 무기라고는 총에 끼운 착검뿐이고 이것도 없어서 쇠막대기 같은 것을 주워 칼이라고 끼웠다. 무기도 탄약도 바닥났다. 차편이 없기 때문에 후닥딱 후퇴할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1,500마일 서쪽에서는 러시아군들이 찌는 더위를 무릅쓰고 몽고사막을 건넜다. 전위 부대는 킹간산맥의 험지를 뚫고 나갔다.
러시아군은 일본해(동해)까지 밀고 나가서 일본본토에 상륙해서 과거 노일전쟁의 패배를 설욕하겠다는 의지였다. 이때까지 러시아군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 이들은 전투에 무경험인 신병들과 불과 3개월 전 서구에서 나치와 싸웠고 베를린에서 노략질을 하던 고참들로 구성됐다. 신병들은 일본군처럼 피골이 상접했다. 그들도 식량이 많이 부족했다. 동부지역서 온 신병들은 옷과 구두가 모자라서 발을 헝겊으로 쌌다.
그게 무슨 문제인가. 러시아군은 20마일 전선을 구축한 후 일본군을 10마일 뒤로 후퇴시켰다. 러시아군은 무자비한 지상공격에 겹쳐 완전한 제공권을 즐기는 폭격기 편대의 도움까지 받았다. 일본군 정예중의 정예라는 관동군은 이렇게 박살이 났다. 이와 함께 러시아 공수부대가 일본군 후방 멀찌기 낙하, 후퇴할 일본군이 지나갈 중요 다리와 기차 터널들을 파괴했다. 이 공격은 대부분 거의 소리없이 수행됐다. 일본군 보초들은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 사이에 목에 칼침을 받았다.
러시아군들은 늘 그렇듯이 진군하면서 많은 만행의 자취를 남겼다. 점령군들은 강간, 탈취, 파괴를 서슴없이 자행했다. 이와함께 구역질나는 전투후의 악취가 만주 농촌을 덮었다. 러시아 전투기 조종사들은 일본군을 기관총으로 마구 쏴죽였다. 죽은 군인들의 시체가 수풀과 습지에 둥둥 떴고 그들 주머니에서 나온 가족사진과 편지들이 바람에 날라다녔다. 그들의 시체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탔던 군마들의 사체 냄새가 섞여 지옥을 연출했다.
러시아의 전략은 만주를 3개 방향에서 공격, 점령하면서 수도 장춘이나 신킹(신경)에서 모든 러시아군이 합세하는 것이었다. 이곳이 중국의 바보같은 마지막 황제(39세)로 영국의 왕 헨리8세를 기묘하게 닮은 푸이가 있는 곳이 아닌가. 일본이 중국을 처음 공격했을 때 그들은 ‘푸이’ 황제를 만주정권의 허수아비 수반으로 앉혔다. [푸이는 2살 때 즉위해서 여러번 인생의 반전을 겪었다. 젊어선 수많은 첩과 40개 코스의 디너를 즐기는 부귀영화도 누렸다. 결국 모든 권력을 잃고 베이징에서 정원사로 일하다가 61세에 생을 마감했다. ]
러시아 총사령관 키릴 메레츠코프 원수는 인생 최고의 순간을 즐겼다. 팔자는 시간문제였다. 러시아의 만주침략은 그에게 국가최고 훈장 ‘오더 오브 빅토리(승리의 훈장)’를 약속했다. 기름끼 다 빠지고 뼈만 남은 일본군 정도는 때려잡기가 누워서 떡먹기 아닌가. 몸집이 크고 잔인한 성격을 가진 원수는 1년간 포위한 레닌그라드(상테 페테스부르크) 전투에서 기고만장하던 독일군을 44년 1월에 굴복시킨 용장이었다. 믿기 어려운 운명의 장난이랄까, 불과 2년전 그는 ‘충성심 부족’이란 이유로 스탈린 특명으로 체포되어 투옥되고 고문당했다.
교통중심지로 아주 중요한 뮤탄치안은 러시아군 수중에 있었다. 원래 계획은 이곳을 17일 만에 점령한다는 것이었으나 러시아군은 단 4일만에 입성했다. 앞으로 닥칠 시범인듯 바로 이날 아침 러시아 탱크부대는 30량 길이의 기차를 타고 허겁지겁 닥쳐온 일본군 지원부대를 기차에서 내리기 전에 말살했다. 9백 명의 일본군 시체가 진흙탕 물에 널렸고 일본군은 고립무원 상태가 됐다.
지구의 반대켠 워싱톤에서 트루만은 기다리다가 지쳤다. 일본 항복에 대한 미국측 답장은 10일 금요일 저녁에 일본에 전달됐는데도 일본의 반응없이 주말이 휘익 지나갔다. ‘우리는 일본의 답장을 기다리느라 신경이 날카로왔다. 지긋지긋한 하루였다”라고 그는 일기장에 기록했다. 다음날 일요일, 12일도 마찬가지였다. 쉬는 날이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 정장을 입고 일을 시작했다. 아침 9시, 일정담당 보좌관이 백악관에 도착했다. 일본서 항복 소식이 오면 트루만의 스케줄을 조율해야 했다. 그러나 하루종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월요일, 8월13일이 됐다. 대통령은 아침 9시부터 오발오피스에서 업무를 시작했다. 트루만은 일본이 미국측 조건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판단, “그렇다면 할 수 없지”라고 혼자말을 하면서 B-29의 도쿄 맹폭을 명령했다. 무기는 어마어마한 화재를 일으키는 화염폭탄을 포함했다. 대통령은 그날 오후 맥아더의 참모장 리차드 서덜랜드 준장과 시간을 보냈다. 물론 토픽은 다가오는 일본본토 상륙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51세의 장군과 또 다른 문제에 대해 대화를 원했다. 그는 일본의 전후복구 감독을 맥아더에게 맡기겠다는 비밀계획이 있었다. 이 문제를 슬슬 꺼내면서 준장의 의중과 의견을 들었다.
그동안 백악관 출입기자들과 사진기자들도 기자실에서 소식을 기다리느라 몸이 지쳤다.
백악관 밖 워싱톤 거리에서는 “일본이 곧 항복한데”라는 소문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백악관 바로 건너편의 라파엣트 광장에서는 심지어 시민들이 촛불을 켜고 밤을 지샜다. 이들은 일본이 항복하면 그때 백악관을 중심으로 벌어질 역사의 현장을 목격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가타부타 반응이 없으니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트루만의 표정과 행동은 오히려 조용했다. 체념한 듯 했다. 라파엣트 광장의 시민은 이젠 1만명 정도가 됐고 카메라맨을 대동한 기자들은 24시간 철야 대기상태를 유지했다. 잠깐이라도 한 눈 팔다가 뉴스를 놓치면 회사에서 징계감이 될 뿐 아니라 평생 오명이 따라다닐 염려도 있었다.
7천마일 떨어진 만주에서는 수타오링 고지를 놓고 일본군과 러시아군이 치열하게 싸웠다. 어짜피 죽을 몸, 목숨을 내놓은 일본군은 러시아 탱크부대의 전진을 몸으로 막았다. 러시아는 고지를 4개 지역으로 나누고 고지를 향해 가지고 있던 모든 무기를 동원, 4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무섭게 포격했다. 고지를 깎아 평지를 만들고 적들을 전멸시키겠다는 의도 같았다. 일본군은 카미가제 특공대나 인간어뢰 같은 자살공격으로 대항, 러시아 탱크 21대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전투는 영원할 수는 없었다. 다음날 새벽 일본군은 5일간 버티던 고지를 내주고 퇴각했다. 일부 광기어린 용사들은 퇴각을 거부하고 고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도쿄에서는 미군 비행기들이 수십만 장의 삐라(리플렛/전단지)를 시내에 뿌렸다. 일본국민들에게 더 이상 저항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이해시키는 내용이었다. 그래도 아무 반응이 없자 수시간 후 무려 821대의 B-29폭격기가 도쿄 하늘을 까맣게 덮었다. 일본전투기 대항도 대공포 포탄도 없었다. 하늘은 마치 미군기들이 마음놓고 날아다니는 그들의 안방같았다. 이 폭격기들이 가득 싣고 온 것은 삐라만이 아니었다. 이들은 ‘막장(The Big Finale)’ 이라고 이름붙인 작전으로 힘의 시위를 하면서 도쿄거리에 폭탄과 화염탄을 마구 떨궜다. 새로 폭격할 장소와 대상이 부족하자 폭격한 곳을 또 폭격했고 이미 타버린 건물에 또 화염탄을 떨어뜨렸다.
8월14일, 화요일, 하오 1시, 워싱톤 시민들이 전쟁의 종료를 애타게 기다릴 때 도쿄는 다시한번 불바다가 됐다. 히로히토의 항복선언이 나오기 불과 23시간 전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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