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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달러 지폐의 얼굴
정숙희 논설위원(LA)
- 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editorial@koreatimes.net)
- Mar 03 2021 04:02 PM
20달러는 미국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지폐권이다. 이 돈의 앞면에 새겨진 인물은 미국의 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이다. 그런데 머잖아 그 얼굴이 흑인여성 인권운동가 해리엣 터브먼으로 바뀔 전망이다. 지난 25일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연방재무부가 터브먼을 20달러 지폐에 넣는 계획을 신속히 재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계획은 원래 2016년 오바마 행정부 시절에 추진됐었다. 노예제를 강력 옹호했던 앤드류 잭슨을 밀어내고 최초의 흑인여성을 미국 지폐에 넣는다는 점에서 여성계를 비롯한 각계의 전폭적인 지원과 호응이 있었고, 여성참정권 100주년이던 지난 2020년에 새로운 지폐 도안이 발표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바로 그해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 의해 무산됐다. 트럼프는 잭슨의 열렬한 팬이다. 취임 직후 백악관 집무실에 잭슨의 초상화를 걸었고, 그의 묘지와 생가를 방문까지 했다. 그런 그가 잭슨이 20달러 뒷면으로 밀리도록 놔둘 리는 만무한 일. 2019년 스티븐 므누신 전 재무장관은 “2028년까지 20달러 지폐가 교체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고, 트럼프는 한술 더 떠서 “터브먼은 20달러가 아닌 2달러 지폐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2달러 지폐는 2003년 이후 발행되지 않고 있으니, 이 계획 자체를 없애라는 뜻이다.
미국 달러화의 인물은 모두 백인남성이고, 대부분 ‘건국의 아버지’거나 노예제를 옹호했던 사람들이다. 1달러 지폐에는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2달러 지폐에는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10달러에는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 50달러에는 18대 대통령 율리시스 S. 그랜트, 100달러 지폐에는 벤저민 프랭클린이 인쇄돼있다. 노예제도를 반대하고 폐지한 사람은 5달러 지폐에 인쇄된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한사람뿐이다.
화폐는 나라를 대표하는 얼굴과도 같다. 그런데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지폐인물은 최근까지 남성 일색이었다. 역사에서 여성의 존재와 역할이 그만큼 무시되고 사장돼왔음을 뜻한다. 그나마 유럽은 상대적으로 많은 여성이 지폐에 나오고 등장 시기도 이른 편이다. 특히 엘리자베스 여왕은 전 세계 화폐에 가장 먼저, 가장 많이 나온 여성이다. 왕위에 오른 이듬해 1954년부터 2011년까지 영국을 비롯한 캐나다, 뉴질랜드 등 영연방에 속한 20여 국가의 다양한 지폐에 다양한 시기의 여왕 얼굴이 인쇄돼있다.
미국 최초의 흑인 지폐 모델이 될 해리엣 터브먼(Harriet Tubman, 1822 ∼1913)은 메릴랜드주 농장 노예로 태어나 숱한 폭행과 학대 속에 살다가 1849년 노예제가 폐지된 필라델피아로 도망쳤다. 이때 그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이 ‘지하철도’ (Underground Railroad)라는 점조직으로, 19세기 중반 수천명의 남부 노예들이 북부의 자유주나 캐나다로 탈출할 수 있게 도운 비밀조직이다. ‘지하철도’를 통해 자유를 얻은 터브먼은 곧바로 자신이 연락책이 되어 다른 노예들을 탈출시키기 시작했고, 1850년부터 10년 동안 300여명의 흑인을 한 명의 낙오자나 부상자 없이 구출해냈다.
남북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북군의스파이가 되어 남부군의 중요한 군사정보를 빼돌렸고, 이러한 능력을 인정받아 제임스 몽고메리 장군을 돕는 군사 고문이 됐다. 1863년 무장군대를이끌고 사우스캐롤라이나 콤바히 강을 따라 700여명의 노예를 해방시킨 습격작전을 감행해 북군들에게는 ‘터브먼 장군’으로, 흑인들에게는 ‘검은 모세’ 혹은 ‘모세 할머니’라고 불렸다. 전쟁이 끝나고 노예제가 폐지된 후에는 여성의 참정권을 위해투쟁했으며, 죽을 때까지 가난한 흑인들을 돕고 평등과 인권을 위해 헌신한삶을 살았다.
2월은 ‘블랙 히스토리의 달’이었다. 미국의 역사와 문화가 다양성을 포용하기를 원한다면 흑인 역사도 공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정숙희 논설위원(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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