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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유 클로델
Camille Claudel (1864~1943)
- 미디어2 (web@koreatimes.net)
- Mar 09 2021 04:53 PM
로댕이라는 바다를 건넜던 조각가 꿈 하나를 깨는 데 일생이 걸렸던 카미유
카미유 클로델은 1864년 프랑스 북부 엔(Aisne)의 페레앙타르드누아에서 등기소 소장이었던 아버지 루이즈프로스퍼 클로델과 어머니 루이즈아테네즈 세르보 사이에서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카미유는 빼어난 미모와 자부심, 용기 그리고 고집이 무척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의 어린 시절은 그다지 행복한 편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유독 동생들인 루이즈와 폴만 사랑했으며 그러한 편애로 훗날 카미유가 정신병원에서 지내게 된 근본 원인이기도 했다. 그는 남동생 폴과 가깝게 지냈는데 폴은 시인이자 외교관이 되었으며 후손이 없던 카미유의 보호자가 되었다.

▲ 20대의 카미유 클로델
1876년 아버지의 전근으로 전 가족이 노장쉬르센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3년간 거주했다. 카미유는 남다른 재능으로 주머니에 항상 작은 칼을 가지고 다니며 흙을 다루는 데 사용했다. 근처 숲속에서 놀던 카미유는 우연히 울퉁불퉁하고 괴물같이 생긴 '제앵'이라는 바위를 발견했다. 이 바위는 그의 조각 본능을 드러내게 한 결정적 계기였다. 그는 진흙으로 이 바위의 형상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정식 조각교육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 나폴레옹 흉상이나 비스마르크, 다비드와 골리앗에 관한 이야기를 소조작품으로 만들기도 했다.
아버지는 딸의 재능을 알고,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파리 몽파르나스에 아파트를 빌렸다. 여동생 루이즈는 음악학교, 폴은 문학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노장 조각가인 알프레 부셰(Alfred Boucher)에게 카미유를 정식으로 조각수업을 받게 했다. 부셰는 제자 카미유를 프랑스 국립미술학교(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시키기 위해 교장인 폴 뒤부아에게 소개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 국립미술학교에는 여학생을 받지 않았기에 거부당했다.

▲ 카미유 크로델 작/ 로뎅의 흉상/브론즈/1888-89

▲ 지강티의 두상/브론즈/1885
1881년 카미유는 부셰의 도움으로 사립학교 콜라로시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조각에 전념했고 친구들과 노트르담 데샹 근처에 작업실을 빌려 조각에 열중했다. 틈틈이 부셰가 카미유를 찾아가 지도를 해주었다. 1882년 카미유는 하녀인 엘렌을 모델로 조각작품을 만들어 살롱전에 첫 출품했다.
[살롱전 : Salon. 1667년 시작된 프랑스의 권위있는 미술 전람회이다.]
1883년 부셰는 로마로 떠나기 전 당대의 유명한 조각가이자 친구였던 로댕에게 자신의 제자들을 위탁했다. 이때가 로댕과 카미유와의 첫만남이었다. 그 당시 카미유는 19세, 로댕은43세였다. 이미 20년간 동거하고 자기 아들을 낳은 로즈 뵈레가 있었던 로댕은 어린 카미유와 사랑에 빠지고 만다. 로댕의 도움없이 루이즈를 모델로 '16세의 내 동생'을 완성했는데 로댕은 극찬했다. 훗날 카미유는 남동생을 모델로 '37세의 폴 클로델'과 '42세의 폴 클로델 흉상' 을 제작하기도 했다. 또 카미유를 짝사랑하던 모델 지강티를 조각한 '지강티의 흉상'을 1885년 제작했는데 이 작품의 생명력은 말할 것도 없이 마치 살아있는 듯해 로댕은 그녀의 재능에 다시 놀라게 된다.
그때부터 카미유는 가족과 상의도 없이 로댕의 작업실에서 제자 겸 모델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24살의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둘의 사랑은 더욱 깊어갔다.
로댕은 모든 사교모임에 카미유를 동반하고 다니며 그녀가 대단한 조각가임을 주지시켰다.
1887년 카미유는 로댕의 작업실에서 조수로 일하면서 로댕의 작품인 <칼레의 시민>, <지옥의 문>, <입맞춤> 등 공동제작에 참여했다.
1888년 카미유는 살롱에서 최고상을 수상하면서 작가로서 인정을 받게 됨과 동시에 세인들에게 질시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부터 카미유의 작품 스타일이 보다 독창적이고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1889년 이후부터 작가로서의 활약이 서서히 커지자 카미유와 로댕 사이에는 갈등이 심화됐다. 거기에 로댕의 사실상 부인이었던 로즈 뵈레의 질투심도 한몫을 했다.
1892년 로즈의 질투와 로댕의 우유부단함으로 카미유는 배신감과 마음의 상처를 안고 로댕과 헤어졌다. 카미유는 실제 작품제작은 제자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끊임없이 사교모임에 나다니던 로댕을 이해할 수 없었다. 로댕과의 결별은 결국 카미유가 예술가로 성공하는데 큰 조력자를 잃어버린 셈이었다.
1893년 <성숙>을 살롱에 출품해서 카미유는 다시 극찬을 받았다. 1894년 로댕의 주선으로 벨기에 예술가협회 전시회에 초대되었는데, 이때까지도 로댕과 계속 서신교환은 했다. 또한 살롱에 <로댕의 흉상>을 출품하여 세인들의 주목을 받았는데 로댕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1899년 살롱에 자신의 역작인 대리석 작품을 출품하였으나, 전시회 중 작품을 도난당했다. 이 사건으로 카미유는 ‘로댕이 내 작품을 훔쳐갔다!’는 음모를 퍼뜨리고 로댕을 비난함과 동시에 영원히 그와 멀어졌다.
1900년 <애원하는 여인)>을 제작하고 1905년 작품 중개상 외젠 블로의 주선으로 그의 화랑에 개인전을 초대받았다. 당시 카미유의 생활은 매우 궁핍했다. 로댕의 모델로 있을 때 그를 사랑한 나머지 돈을 한 푼도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겨울에 연료가 떨어져 추위를 잊기 위해 싸구려 와인을 마셔댔고 결국 알콜 중독까지 오게 되었다. 블로의 화랑에서 작품 13점을 전시했으나 단 한 점도 팔지 못했다. 이는 로댕과 헤어지면서 세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졌고 우울증과 로댕에 대한 피해망상으로 정신착란 증상까지 나타났다.
1913년 3월 의지하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카미유의 증세는 극에 이르렀다. 결국 동생 폴은 카미유를 요양소에 강제입원시켰다. 1차 세계대전 발발로 카미유는 프랑스 남부 앙김의 몽드베르그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이후 약 30년간 바깥 출입을 금지 당하는 등 유폐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 그는 동생에게 조각을 하고 싶다고 호소했지만 묵살됐다.

▲ 사쿤탈라/대리석/1888

▲ 중년 /청동/1893-1899/오르세 미술관
1943년 10월 카미유는 79세의 나이로 몽드베르그 수용소에서 쓸쓸하게 사망했다.
카미유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묻혀 있었지만 1980년대 이후 그의 작품들이 재조명받기 시작했고 1984년 폴의 손녀이자 전기작가인 렌마리 파리가 자신의 고모할머니였던 카미유의 이야기를 책으로 발간했다.
로댕의 작품을 표절했다는 소문과 오히려 로댕이 카미유의 작품을 표절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둘은 작품을 공동제작하기도 했고 카미유가 로댕에게 진심을 담아 작품을 바치기도 했으니 서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정리/주간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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