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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왕, 하마터면 ‘지옥’갈 뻔
경호책임자 쏴죽인 쿠데타군 황궁수색
- 미디어2 (web@koreatimes.net)
- Mar 08 2021 06:16 PM
히로히토 지하벙커에 숨어 목숨건져 ‘항복’이란 단어 없는 항복문서 서명 후 충성파 군대 몰려와 반란군 제압, 구조됐다
중국 만주
1945년 8월 13일 오후
히로히토는 불바다를 보지 못했다. 그는 아직도 정장 군복을 입고 지하벙커에서 움추리고 있었다. (주: 아마도 벽장 속이나 책상 뒤일 지 모른다.) 왕궁 밖에서는 젊은 일본제국주의 육군 장교들이 봉기하고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히로히토를 항복을 못하게 없애버리고 자기들이 계속 싸우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미 때는 늦었지만.
3시간 전 히로히토는 미국이 제시한 조건을 수락한다는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문서는 중립국 스웨덴과 스위스에 보냈다. 두 나라는 항복문을 미국, 영국, 중국, 소련에 전달했다.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NHK 일본방송 테크니션이 일왕을 쳐다보면서 항복 담화를 녹음했다. 녹음테이프를 2개 만들어 왕후가 보관했다.
켄지 하타나가 소령과 지로 시이자키 중령이 지휘하는 반군은 전날 하오 4시 왕궁의 일부를 점령했다. 이들은 왕궁 경호책임자 타케시 모리 중장이 쿠테타 동조를 거부하자 더 설득하지 않고 그를 사살했다. 곧 그의 사무실에서 모리 중장의 개인도장을 찾아서 왕궁 경호군 7명에게 보내는 가짜 명령서에 도장을 찍었다. 명령서는 모리가 이들에게 쿠테타 동조를 명령하는 내용이었다.
이어서 왕궁과 외부와의 모든 통신을 차단했다. 하타나카와 시이자키는 왕궁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목표를 찾기 시작했다.
히로히토와 그의 항복문서 녹음이었다. 도쿄 중심부로 뻗은 황궁에서 일왕이 숨을 장소는 많았다. 두 장교는 눈에 불을 켰다.
그들은 왕궁경호대를 무장해제했고 18명의 왕궁 직원들을 체포, 히로히토의 숨은 곳을 추궁했으나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갑자기 어둠이 닥치고 미군폭격은 도쿄의 모든 전기공급을 차단했다. 히로히토가 숨은 지하벙커는 더욱 스산한 모습이 됐다. 그가 어둡다고 불을 찾아 벙커를 나가면 그건 죽음을 의미했다. 그는 숨도 크게 못쉬고 계속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주: 혹은 누워 있었다) 그는 세상과 완전 단절됐다. 거대한 돌로 쌓아서 오래동안 그만의 세계였던 안전빵 왕궁이 이젠 감옥이 됐다. 그의 인생 처음으로 그를 소중히 받들어줄 사람도, 그에게 아부할 사람도, 그를 보호할 사람도 없었다. 태평양 여러 섬에 배치됐다가 동굴에서 죽은 많은 일본군처럼 히로히토는 바위 돌 안식처에서 숨어서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내일 아침까지 살아 있을지 자문하면서.
▲ 벙커 입구.
▲ 히로히토 일왕이 항복 결정했던 지하벙커 회의실.
새벽 3시, 충성파들이 왕궁을 습격했다. 숫적으로 열세인 하타나카와 시이자키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두 사람은 수 시간 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아침 7시21분 해리 트루만이 워싱톤에서 항복문서를 받은 지 15분 후 일본공영방송 NHK는 특별메시지라면서 일왕이 정오에 국민들에게 직접 연설한다고 예고 방송했다.
트루만은 지친 몸을 달래며 방금 백악관 수영장에서 수영을 마치고 나왔다. 14일 화요일 저 녁 7시 직전이었다. (일본 및 한국시간은 수요일 15일 정오) 이때쯤 그의 집무실 오발오피스는 길이 36피트, 폭 29피트 크기인데 기자들, 카메라맨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파랑색 셔츠에 파랑색 더블 브레스트 수트를 입은 대통령은 그의 책상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나는 오늘 오후 일본정부의 메시지를 받았다.” 대통령은 연설문을 오른 손에 쥐고 말을 이었다. “무조건 항복을 규정한 포츠담선언을 수락한다는 내용이다.”
백악관 밖에는 약 50만 명은 되어보이는 시민이 파티를 시작했다. 주간지 양크Yank는 ‘엄청난 인간무리가 긴장을 풀고 소리를 지르면서 마시고 색종이를 날리고 아무하고나 키스를 하면서 승리를 축하했다’고 보도했다. 1월1일 신정이나 뉴올리언스에서 열리는 마디그라스 파티의 모든 것을 담았다고도 기술했다.
트루만은 부인 베스Bess 와 함께 백악관 정원으로 내려섰다. 마침 “트루만 나와라.” “트루만 어디있나”라고 철책 밖의 군중들이 소리쳤다. 대통령은 승리를 의미하는 두 손가락을 높이 들고 V자를 그려 보였다. 드디어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난 것이다.
일본에서는 전국적 애도의 시간이 시작됐다. 히로히토의 방송은 도시와 작은 마을 구석구석까지 전해졌다. 해외 일본군은 단파방송을 통해서 담화를 들었다. 국민들은 자기들이 하늘같이 모시는 왕의 목소리를 직접 들은 것은 이것이 처음이어서 그들은 방송을 듣고 놀랐으며 호기심조차 들었다. 그렇지만 국민들은 혼란스러웠다. 녹음의 질이 나빴을 뿐 아니라 일왕은 지금은 쓰지 않는 옛날 말을 썼기 때문이다.
“친애하는 충성스런 신민 여러분,” 왕은 자기 목소리대로 높은 고음으로 연설을 시작했다. “세계의 변화와 우리가 당한 실제상황을 깊게 고려한 결과 우리는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현재의 상황을 타개하기로 했습니다. 전쟁은 거의 4년이나 계속됐습니다. 그동안 군대는 용감히 싸웠고 공무원들은 근면하고 봉사적으로 일했습니다. 1억명 신민들의 헌신적 봉사에도 불구, 전쟁상황은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되지 않았고 세계는 일본 이익에 반대 방향으로 진전했습니다.”
히로히토는 항복이란 단어를 결코 쓰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신민들은 참을 수 없더라도 고통을 참으면서 후대인들에게 평화의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위안 을 주었다. 아버지도, 남편도, 아들도 전쟁터에서 마침내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겐 그것은 창피를 의미했고 그래서 분노가 머리끝까지 올랐다.
히로히토는 국민들이 차마 예상하지 못했던 말로 담화를 마쳤다.
“힘을 합쳐서 미래를 위한 건설에 헌신합시다. 도덕적으로 바르게 살고 고귀한 정신을 유지하며 단호한 마음을 갖고 일합시다.
이렇게 해서 제국의 내면적 영광을 높이고 세계의 발전에 발을 맞춰 나갑시다.” 이제까진 전쟁이었고 앞으로는 건설이라. 허리띠 줄이라는 말이 아닌가. 담화에는 전쟁에 대한 사과라든지, 책임자 엄벌같은 내용은 전혀 없었다.
전쟁패배는 전국에 전해졌다. 일왕 충성파는 담화를 듣고 너무 놀라서 땅에 주저앉았다. 군인 수백명은 항복을 받아들이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며 할복했다. 육군과 해군들은 자살을 공공연히 알렸다. 즉, 그들은 황궁 앞 자갈 밭에 꿇어앉아 권총을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분노의 복수도 있었다.
규슈 섬 일본군은 포로가 된 미군조종사들을 감방에서 꺼내 칼로 목을 베었다. 이같은 전쟁범죄의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히로히토의 담화가 끝나자마자 전국의 군 당국은 미군조사관들에게 증거가 될 만한 서류와 모든 기록들을 소각했다. 이 중에는 동양인 위안부에 대한 것, 731생체실험부대의 야만적 기록등도 포함됐다. 한국, 중국 등 점령지에서 일본을 위해 헌신하던 밀정(스파이)들의 기록도 잿더미가 됐다.
한때 전지전능하던 일본은 곧 점령군의 통치를 받을 것이다. 반신반인 히로히토도 이젠 이를 막을 수 없다. 그런데 미국은 과연 보복할까. 점령사령관은 일본의 생활양식을 파괴할까. 아무도 모른다. 또 일본인들이 이같은 점령통치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할 지 아는 사람도 없다.
확실한 것 하나는 곧 새 황제가 도착한다는 것이다.
더글러스 맥아더, 그를 환영하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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