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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통치자로 일본 땅 밟다
일본대표단은 개인적 모욕 우려, 도죠 수상등 참석 회피
- 미디어2 (web@koreatimes.net)
- Mar 21 2021 08:20 PM
미군함정 300척이 ‘맥’장군 호위부대
앗수기 비행장
일본 혼슈 칸토 평야
1945년 8월30일 하오 2시 5분
▲ 맥아더 장군이 역사적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그 뒤 일본군 포로로 죽다가 살아난 빠짝마른 두 장군이 증언하기 위한 듯 서있다. 왼쪽은 웨인라이트 미군 장군, 오른쪽은 퍼시벌 영국군 장군. 맥아더는 이들을 세워서 일본군의 야만행위를 세계에 보이려 했다.
또한 미주리는 미국이 건조계획한 마지막 전함이었다. 그래서 도쿄만으로 들어가기 직전, 사우스다코다 함은 원래 항복식 함정으로 지정됐다가 미주리에 영광을 넘겨주었다.
45년 8월29일 이른 아침 일본의 항구안내원(“pirot”)이 미주리함에 올라왔다. 배가 항만에 부설한 일본기뢰를 피해서 도쿄만으로 안전하게 진입하도록 안내하기 위해서였다. 도쿄만 바닷속에는 수많은 폭발물들이 설치되어 연합군 함정의 접근을 막았다. 안내원은 함교 조타操舵실에 올라와 에드 카란타 3등운항기사를 도와 4만4,500톤의 함정 입항을 도왔다.
카란타는 1년전 미주리함이 중남미 파나마 운하를 지나 태평양으로 나갈 때 좁은 수로와 저수탱크 벽에 부딪치지 않고 잘 나가도록 운항한 기사다. 이때 함정의 양옆으로는 불과 1피트씩의 여유 밖에 없어 모두들 손에 땀을 쥐고 아슬아슬한 장면을 지켜보았다. 20살된 카란타와 일본 안내원이 함정을 역사의 장소로 안내할 때 윌리엄 할시 제독은 그들의 아래 층에 있었다.
미주리는 정오 전에 닻을 내렸다. 곧 항복문서 조인식 연습이 시작됐다. 승무원들은 전세계서 몰려온 기자단과 세계 지도자들이 발붙일 자리를 찾느라고 분주히 돌아다녔다.
함내 방송이 나왔다. 일본대표단이 승선할 때 이들을 맞을 8명의 해군장병을 찾는다고 방송됐다. 가능하면 키가 아주 큰 병사들을 찾는다고. 이는 상대적으로 키가 작은 일본인들에게 미국 힘을 과시하려는 의도였다.[좀 유치하다]
이날 오후 연합군 함정들이 줄지어 항만으로 들어오는 가운데 미주리함의 어마어마한 함포들은 포구를 도쿄로 향하고 언제든지 발사할 준비태세를 갖추었다. 전쟁은 끝났을 지 모르지만 미군들에 대한 신체적 위험성은 상존했기 때문이다.
[행사보다 수개월 앞서 일본 가미카제특공대 전투기는 미주리함의 메인데크 바로 아래쪽으로 충돌했다. 큰 인명피해는 없었고 미주리는 수리를 빨리 끝내고 다시 전투에 참가했다. 사고 뒷처리를 하던 수병은 일본 특공대원 셋수오 이시노 시체를 발견했다.
불과 19세. 윌리엄 캘러간 대위는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전쟁의 비극이 그의 가슴을 울렸다. 명령에 따라 그는 최선을 다해 임무를 수행했으므로 군 예식으로 장사 지내주기로 했다. 그의 몸을 일본국기로 감쌌다. 기도와 간단한 설교가 있은 후 소총부대가 공포탄을 하늘에 쏘았다. 총소리를 들으며 그의 시체는 물속으로 들어갔다. 함정 수병들은 모두 차렷자세를 취하고 시체를 향해 경례했다.]
9월2일 일요일 정각 9시 맥아더는 할시 제독 앞을 지나 마이크앞 스피커 자리에 섰다. 다른 미군 제독, 장군들과 같이 빳빳한 카키색 유니폼 차림이었다. 11명의 일본대표단은 정장 군복차림이었고 정식 연미복에 높은 모자까지 쓴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맥아더 생각은 처음부터 카키복이었다. “우리는 카키를 입고 당신들과 싸웠기 때문에 같은 복장을 하고 항복을 받겠다”고. 일본대표들은 외무성 직원 4명, 부제독, 육군중장, 해군대위, 육군대령, 육군참모총장, 육군소장 등이었다. 도조 수상이나 장관급 또는 왕실대표자는 없었다.
[일본대표중 누구도 참석을 원한 사람은 없었다. 항복에 따른 치욕이 개인적으로 따를 것으로 생각했다.]
2천명의 미주리 수병들은 흰색 정복을 입고 함포 등 함정 여기저기에 서서 기막힌 역사를 목격하려고 했다. 메인데크는 언론인들, 하객들과 무기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돌적 윌리엄 할시제독은 미주리함 타고
사흘전부터 일본군을 비밀리 관찰
윌리엄 할시
아침에 비바람을 쳤던 하늘은 회색이었고 전반적인 분위기는 밋밋했다.
“주요 참전국 대표들은 오늘 이자리에서 평화를 찾기 위한 엄숙한 합의서에 서명하고자 모였습니다”라고 맥아더는 마이크를 통해서 말했다. “문제가 됐던 여러 이상과 사상문제는 전쟁터에서 결정됐기 때문에 오늘은 토의되지 않습니다.”
녹음된 미국국가가 연주됐다. 1852년 일본의 개방을 요구한 페리 제독 함정들이 달았던 성조기(31개 별이 31개주를 대변함)가 어설프게 꽂혀 있었다. 워싱톤 의사당에서 가져온 성조기는 깃대에 높이 달려 힘차게 날렸다. 일본대표단은 모두 시무룩한 표정으로 식이 빨리 끝나기를 고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중에 장군들은 항복의 표시로 그들의 칼을 풀어서 내놓았기 때문에 이미 불명예를 당했다. 일본외교관들은 이날 아침 그들의 차에서 일본기를 내렸다.
“연합국의 최고사령관으로서 나는 항복조건들이 완전히, 즉각적으로 또 성실하게 이루어지도록 최선을 다하면서 내 조국의 전통에 따라 정의와 관용에 바탕을 두고 책임을 수행할 것임을 분명히 한다.”
맥아더는 노트를 꺼내 보았다. 일본인들은 항복서에 서명할 책상 앞에서 그가 연설하는 것을 수용했고 그는 당당하게 높이 서서 말을 마쳤다.
“나는 이제 일왕대표와 정부대표 및 일본 제국주의 군대표가 문서에 서명하기를 바란다.”
커피자국이 묻은 진한 초록색 책상카버는 그날 아침 함정식당에서 가져온 것이다. 영국정부가 기증한 행사용 마호가니책상이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항복문서 원본과 복사본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가죽포장은 미국에, 천포장은 일본에 줄 것이다. 항복문은 마닐라 지하실에서 나온 드물게 보는 양피지에 인쇄됐다.
먼저 항복자들이 서명하고 나서 승리자들이 이어서 서명했다. 고요한 순간 이 광경을 열심히 담는 카메라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식은 23분 후 끝났고 동시에 전세계에 방송됐다.
맥아더는 책상 머리에 있는 평범한 나무의자에 앉아 여러 개의 만년필을 바꿔가면서 자기 이름을 두번 씩 부지런히 썼다. 그는 만년필 1개를 존 웨인라이트 소장에게 주었다. 그는 필리핀이 일본군에 점령당할 때 포로가 되어 일본포로수용소에서 지내다 돌아온 그의 친구였다.
그는 맥아더가 코레기도(Corregidor)를 빼앗긴 후 미정부가 명예훈장을 수여한다고 했을 때 이를 거절하도록 한 사람이다. 맥 장군은 미군들이 코레기도를 좀 더 오래 방어했어야 마땅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해골처럼 피골이 상접한 웨인라이트 장군을 보았을 때 일본군의 구타와 고문, 굶주림이 그의 수용소생활 3년 내내 계속 됐음을 알고 그의 용기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다른 펜 1개는 아서 퍼시벌 영국군 중장에게 주었다. 그도 싱가폴 함락 이후 일본군 포로수용소에서 같은 고생을 했다. 웨인라이트 처럼 퍼시벌 장군도 수용소를 몇 번 옮겼다. 그가 연합군에 구조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전쟁 말 두 사람은 만주 시안에 있는 같은 수용소에 수용됐다. 맥 장군은 특히 수용소생활로 바짝 마르고 영양부족인 이 두 장군이 서명책상 바로 뒤에서 일본대표단에게 잘 보이도록 했다.
식이 끝나자 맥장군을 꼿꼿하게 서서 ‘행사가 모두 끝났습니다”고 방송했다. 일본대표단이 육지로 돌아가려고 보트에 탈 때 미군비행기 편대가 머리 위를 지나갔다. 대표단은 올려다 보면서 굉장한 메시지를 받았다. ”이제부터는 미국인들이 당신들의 상전이라는 것.”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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