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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년 12월22일 자정 일본 최고의 전범 7명 교수형 집행
- 미디어2 (web@koreatimes.net)
- Apr 19 2021 07:10 PM
미군 쓰레기수거자 복장에 두 발에는 족쇄, 검은 주머니로 눈 가려 평균 1인당 90초 걸려, 그자리서 화장하고 재는 버리다 원흉 중의 원흉 도조는 끝내 진정성 없이 “미안하다”고 한마디
백악관, 워싱톤 DC
1948년 겨울
▲ 트루만대통령이 ‘The buck stops here’라는 팻말을 책상에 놓았다. 원자탄 투하에 대한 찬반 여론이 거세게 일자 ‘모든 것은 내 책임’이란 뜻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각료나 장군이나 과학자 책임이 아니라 바로 자기 책임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한국이나 북한 최고지도자들의 비겁한 변명과 다르다.
▲ 도조를 비롯한 7명의 전범은 스가모 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약 8개월 후 도쿄 스가모교도소 시계는 자정 20분 전을 가르키고 있었다.
스님 1사람과 교도소 목사 신소 하나야마는 오늘 밤 12시 교수형을 당한다. 죽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1급 전범 7명의 영적 지도자 하나야마 목사와 스님은 교도소 사원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을 감싸안으며 마지막 순간을 보냈다. 48년12월 22일이었다.
두 명의 미군목사는 사형집행 증인으로 왔다. 그러나 하나야마 목사는 사형집행실에 들어오는 것은 금지됐다. 한사람씩 불교의식장을 떠날 때마다 스님은 “사요나라(굿바이)”를 되풀이했다. 히데키 도조장군이나 전 총리대신 코키 히로타 같은 집단살인범들과도 “사요나라” 후에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전쟁의 마지막 장을 마감하는 사형장의 증인은 모두 9명이었다. 총 20명의 사형수, 보안원, 수감자들과 법적 서류를 만들 법원서기들 등 총 20명이 장면을 지켜 보았다. 사형수의 아내나 가족은 초대되지 않았다. 이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비정상적 행동이나 사진촬영을 금지한다고 엄격히 명령했다.
처형명령서는 가능하면 12월23일 자정 직후 집행하라고 했다. 스가모의 사형집행실은 아주 작아서 목매는 밧줄이 4개 뿐이었다. 그래서 사형수들을 2교대로 나눌 수 밖에 없었다. 시계가 12시를 향해서 다가갈 때 사형수들은 미육군 쓰레기 수거자 복장으로 갈아 입었다. 계급장같은 군대 장식은 모두 제거됐다.
그들의 발은 쇠줄로 묶였다. 허리 벨트는 몸둥어리를 묶었다. 사형수마다 2명의 미군경비원이 데리고 간다. 첫 팀은 켄지 도이하라, 이와네 맛츠이, 아키라 무토, 그리고 히데키 도죠, 모두 장군들이다. [도이하라는 중국인들을 아편중독자로 만들고 만주침략을 주도함. 맛츠이는 난킹 양민학살 및 집단 성폭행 주도자, 무토는 중국, 스마트라, 필리핀에서 비인간적 행위를 장려함, 도죠는 일본을 전쟁으로 이끈 총리대신.]
족쇄를 딸랑거리며 전범들은 13개 계단을 올라가 프랫폼에 섰다. 사형수는 맨 가장자리에 있었다. 그의 조수 3명은 검은 얼굴가리개를 그들의 얼굴에 덮어씌었다. 다음, 올가미를 달은 밧줄이 위에서 내려오더니 목을 조였다.
같은 식의 집행이 두번째 팀에 이어졌다. 세이시로 이타가키 장군, 코키 히로타, 헤이타로 키무라 장군. 교수형은 29분 간격으로 시행됐다.[이타가키는 전쟁포로에 대한 비 인간적 행위, 전 총리대신 코키 히로타는 일본의 만주침략과 그후 전쟁 확대에 대한 책임, 키무라장군은 도조의 부관이었고 그후 아시아의 총사령관 역할을 했다. 그역시 연합군포로 학대 사살등의 책임이 있었다.]
스님과 하나야마 목사는바닥문이 열리고 사형수들이 떨어지는 소리를 12시 1분과 12시 30분 두 번 들었다고 기록했다.
사형수들은 모두 90초 동안 밧줄에 달려 있었다. 밧줄을 벗은 시체들은 곧 화장됐고 재는 버려졌다. 어떤 신사(神社)도 그들의 생애를 찬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처형자 중에서도 태평양 전쟁으로 수 백만 명의 목숨을 잃게 만든 원흉 도조는 “미안하다”고 단 한마디를 마지막 말로 남겼다. 절대로 심심히 사죄한다든가 하는 반성은 재판때부터 한번도 없었다. 거만하고 피에 굶주린 그는 완전히 실패한 인간이 됐다.
이로서 성탄절을 이틀 앞두고 세계가 경험한 것중 가장 악랄한 일본의 악한들은 모두 갔다.
[다른 6명처럼 도조도 48년12월23일 화장됐다. 미군들이 말렸지만 그의 재는 도쿄의 공동묘지와 야스쿠니 신사(슈라인)에 나눠졌다. 야스쿠니는 일본의 ‘영광스런’ 전사자들을 기리는 말썽많은 곳이다. 그 바로 옆에 있는 유슈칸 군사박물관은 미국이야말로 동아시아 전쟁에서 가장 인종차별적 침략자들이라고 선전한다. 일본국민들에게는 2차대전의 태평양전쟁이 그렇게 알려졌다.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 도조는 그의 군 훈장들을 미군교도관들에게 나눠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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