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주간한국
히로히토, 신(神)에서 연합국 협조자로
- 미디어2 (web@koreatimes.net)
- May 04 2021 07:15 PM
연재를 마치면서
작년 3월6일자부터 시작한 태평양전쟁 연재를 마치면서 관계된 중요인물의 ‘그후’를 더듬어 봅니다. 이 연재를 통해서 많은 새로운 사실을 접했고 특히 일본군인들의 잔인성이 실제였음을 알게 됐습니다. 또 미일전쟁의 이유, 시작, 경과 등을 살펴보았고 맥아더와 트루만의 갈등, 원자탄 사용의 정당성 문제, 히로히토 일왕의 부적절한 태도,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악랄함과 무모함을 접했습니다. 더구나 생전 몰랐던 최고의 전범 도조를 비롯한 여러 전범들의 교수형, 그들의 화장과 재의 행방, 전후 일본의 눈부신 재건의 동력 등을 살펴보았습니다. 원제는 2016년도 판 Killing the Rising Sun이었습니다. 연재를 허락해준 필자와 발행자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중요 등장인물들의 “그후”(3)
51년 4월 11일 트루만 대통령이 맥아더 해임을 발표하자 전국에선 야단법석으로 항의가 일어났다. 트루만에 대한 국민지지율은 다시 바닥을 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싱톤 시간으로 이날 밤 8시를 기해서 그는 정식 해임됐다. 트루만은 육군장관 프랭크 페이스에게 이 소식을 장군에게 전달하도록 지시했는데 공교롭게도 장관은 이 지시를 받지 못했다. 맥아더는 도쿄에서 부인과 저녁을 먹으면서 라디오를 통해 본인의 해임소식을 들었다.
▲ 1951. 4. 22. 뉴욕에서 퍼레이드 중인 맥아더.
▲ 1951 년 4 월 19 일, 워싱턴 DC의 미 국회 의사당 건물에서 아들 Arthur와 아내 Jean과 함께. Douglas MacArthur가 합동 회의에서 연설 후.
이로써 맥아더의 긴 군생활은 마감됐다. 그는 영웅으로 귀국했다. 뉴욕의 환영퍼레이드는 7백만 명이 TV로 지켜보았다. 환영행렬은 맨하튼 지구의 19마일에 뻗쳤다. 3천 톤도 넘는 색종이 세례가 가도의 빌딩, 주택의 발코니와 지붕 위에서 그의 오픈카 행렬에 떨어졌다.
이 와중에 트루만을 탄핵하라는 주장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그의 지지율은 22%로 떨어져 다음해, 52년 대선에 출마하지 말 것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맥아더는 여생을 뉴욕시 왈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펜트하우스에서 부인, 아들과 함께 고급스런 생활을 했다. 62년 그는 전설적인 유명한 ‘의무, 명예, 조국’이라는 연설을 모교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에서 전하면서 이렇게 말을 마쳤다 : 나에게는 그림자가 점점 더 길어지고 있다. 황혼이 닥쳤다. 내 과거에서 위엄과 영광의 색채가 모두 사라졌다.
▲ 1951년 4월22일 맥아더가 오픈카를 타고 뉴욕 브로드웨이를 지나가고 있다.
▲ 맥아더의 장례식은 국장(State Funeral)으로 5일부터 11일까지 일주일간 계속되었다.
그것은 과거의 꿈속에서 반짝일 뿐이다 …. 꿈속에서 나는 대포소리와 소총을 장전하는 소리, 전쟁터에서 나오는 알 수 없는 슬픈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기억이 살아나면 난 언제나 웨스트포인트로 돌아온다. 거기서 나는 이 외침을 듣고 메아리를 다시 듣는다 : 의무, 명예, 조국. 오늘 나는 자네들과 마지막으로 만난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달라, 이제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갈 때 내가 의식한다면 마지막 나의 생각은 내 부대, 내 부대, 오직 내 부대와 함께 할 것이다. 잘 있기를 바란다.
더글라스 맥아더는 64년 4월 5일 간(肝) 염증같은, 당시에는 알 수 없는 병명으로로 유명을 달리했다. 향년 84세. 무덤에 놓이기 전 그의 관은 국회의사당 원형전시실(Rotunda)에 전시됐고 15만 명이 조문을 다녀갔다.
해리 트루만은 매일 오래 걷고 버본 위스키를 즐기는 습관 덕택인지건강을 유지하다가 72년 12월 26일 88세로 자연사했다. 부인 베스는 10년을 더 살다가 남편을 따라갔다. 부부는 미주리 주 인디펜덴스 시의 대통령도서관에 안장됐다.
[끝]
www.koreatimes.net/주간한국
미디어2 (web@koreatime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