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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도 쫓아내는 까칠한 사장님
‘마나님 레시피’ 허식 대표
- 미디어2 (web@koreatimes.net)
- May 11 2021 06:15 PM
마나님 레시피
주객(主客)이 바뀌었다. 식당 사장의 불호령이 밥 한 끼 먹으러 온 손님을 쉴새 없이 난타한다. ‘아줌마’라고 불렀다고 쫓겨나고, 청구서 달라 했다가 구박받는다. 다 먹은 그릇을 포갰다가는 눈물이 쏙 빠지게 혼나고, 음식 품평을 제대로 못해도 꾸지람을 듣는다. 이쯤 되면 불편함을 넘어서서 오기가 발동한다. ‘얼마나 맛있길래.’
뚝딱 차려낸 밥상은 정갈하다. 야채로 우려낸 육수로 삶은 국내산 삼겹살을 울릉도산 명이 장아찌와 함께 싸 먹는 ‘싸실보쌈’. 호박과 새송이버섯, 가죽 장아찌와 들기름을 넣어 맵지 않고 고소한 ‘방실비빔밥’. 쫄깃하고 보드라운 국내산 쌀로 만든 떡과 안동 한우 육수를 넣은 ‘따실떡국’. 장아찌로 만든 소스가 감칠맛을 더해 주는 ‘홍실국수’. 직접 만든 치즈와 다양한 채소를 버무린 ‘수제치즈 파스타’. 이름만 들어봐도 새로운 맛의 세계다.
이 세계의 창조주는 2008년부터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서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요리를 만들어 왔다고 자부하는 ‘마나님 레시피’ 허식(66) 대표다. 허 대표는 “장난 하나 치지 않고 정직한 밥을 만든다는 당당함이 있다”라며 “전부 다 내 손으로 직접 만든 귀한 음식이어서 이를 알아주고, 먹을 자격이 있는 이들에게 밥을 내고 싶다”고 말했다. 투박하고 까칠한 주인장에도 불구하고 식당에 손님이 넘쳐나는 이유다.
니트 디자이너에서 요리연구가로
허 대표는 원래 니트 디자이너였다. 대구에서 나서 원예학을 전공한 그는 졸업 무렵에 우연히 만난 일본의 유명한 니트 디자이너 덕에 디자인에 빠져들었다. 손으로 하는 일은 뭐든 자신 있었던 그는 그 뒤 30여년 동안 니트 디자인을 그려 내고 제품을 만들었다. 대학과 연구소에서 강연도 했다. 지금도 식당 곳곳에 그가 직접 짠 마크라메(실을 짜거나 떠서 매듭짓는 직물 과정) 작품들이 걸려 있다. 양 갈래로 땋은 허 대표의 백발 위에 얹힌 니트 모자 또한 자기 손으로 짠 것이다.
니트에 바친 인생이었으니, 요리를 배운 적은 없다. 식당 일도 모른다. 요리에 관심은 많았다. 허 대표는 “먹는 것을 좋아하고 즐기는 집안 덕에 어렸을 때부터 좋은 음식을 많이 먹었고, 요리에 대한 호기심도 많았다”고 했다. 중학생 때 이미 요리 강습회 같은 곳에서 어깨 너머로 귀동냥을 했고, 사춘기 시절에도 옷이나 장신구보다 솥과 오븐이 더 탐났다. 여러 재료를 써서 뭔가 새로운 요리를 만들면 뿌듯했다. 허 대표는 “친구들이 ‘이거 어떻게 한 거냐, 너무 맛있다’고 하면, 그 재미에 더 신나서 새 요리법을 만들었다.
하지만 직업으로서 요리사를 꿈꾸진 않았다. 음식을 건강하게 차려 내고, 맛있게 먹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만 여겼다. 그러다 2005년, 요리가 업(業)이 됐다. 서울 북촌 인근 절에 사찰음식을 배우러 다녔는데, 문득 ‘여기쯤에 요리할 만한 곳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옥 사이 골목을 다니다 장독이라도 눈에 띄면 ‘저기 장아찌를 담그면 좋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마침 비어 있는 가게 하나가 있었다. 그 길로 계약을 했다. 운명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장아찌 제조ㆍ판매점인 ‘계동 마나님’이다. 애초부터 식당 차려 돈 벌 생각은 없었다. 산지에서 직접 구해 온 다양한 재료로 장아찌를 담그면서 밤낮으로 요리법 그 자체만 연구했다. 허 대표는 “요즘 사람들은 장아찌를 짜다고 멀리하는데, 짜지 않고 간이 맞으면서도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비법을 만들기 위해 정말 열심히 연구했다”고 말했다.
명이, 가죽, 콩 등 산속에서 채취한 나물들로 만든 그의 특제 장아찌가 그 결과물이다. 입소문은 금방 퍼져 나갔다. 한번 맛을 본 사람들은 너도나도 그의 장아찌를 찾기 시작했다. 허 대표는 북촌의 명사가 됐다. 개그맨 전유성도 그의 단골이다.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는 ‘종심(從心)’인 70세를 바라보는 그는 “나의 모토는 ‘여기, 지금(Here and Now)’ 이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돈 벌면 이거 하고 저거 하고, 계획 세우는 건 젊었을 때나 하는 거예요. 이 나이쯤 되면요, 알게 모르게 지은 죄가 많아요. 그러니 더 이상 죄를 짓지 말아야죠.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좋은 일을 하자는 게 내 모토에요. 나한테는 서로를 존중해 주는 사람들과 맛있는 밥 한 끼를 나눠 먹는 게 지금,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거에요.”
식당도 그렇게 시작됐다. 허 대표는 “장아찌를 사면서 밥 한 그릇 달라고 해서는 가게에 앉아 뚝딱 먹고 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사람들이 다들 식당을 차리라고 했다”며 “내 요리를 알아봐주시는 분들 덕에 내 요리를 선보일 용기를 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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