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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의 열매
민경훈 | 논설위원 (LA)
- 캐나다 한국일보 (editorial@koreatimes.net)
- May 21 2021 03:46 PM
5월은 ‘아시안 아메리칸 유산의 달’이다. 1990년 아버지 부시가 미국 내 아시안 아메리칸의 역사와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이를 정한 법안에 서명한 지 30년이 넘게 지났지만 일반 미국인은 물론 아시안계 이민자조차 정작 조상들이 미국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타임지는 최근 아시안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사건 11가지를 선정했다. 이중 일부를 소개하면 미국에서 가장 먼저 뿌리를 내린 아시안은 필리핀계다. 1765년부터 1800년까지 ‘마닐라팬’으로 불리던 필리핀 선원들이 멕시코만을 오가던 스페인 배에서 탈출해 미국에 정착했다. 마리나에스피나에 따르면 1880년대까지 루이지애나 일대에 8개의 필리핀계 이민자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또 하나는 1854년 ‘국가 대 홀’ 사건이다. 살인 혐의로 기소된 홀 사건을 심리하면서 가주 대법원은 3명의 중국인 증인의 증언 능력을 박탈해 결국 홀은 무죄로 풀려났다. 이 사건으로 중국인들은 증언 능력을 상실하면서 백인과의 분쟁에 불리한 위치에 설 수밖에 없게 됐다.
아시안들이 항상 당하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898년에는 아시안과 이민자 권익 옹호에 기념비적 사건으로 평가받는 ‘연방 정부 대 웡 킴 아크’ 재판이 있었다. 중국 이민자의 아들로 187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웡 킴 아크는 중국을 방문한 후 1895년 미국으로 돌아왔는데 이민국이 그의 재입국을 불허했다. 1882년 제정된 ‘중국인 배척법’에 따라 중국인은 미국 시민이 될 수 없기 때문에당연히 그 자녀도 미국인이 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이에 웡은 굴하지 않고 미국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수정 헌법 14조를 들어 이민국 결정이 부당하다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은 결국 연방 대법원까지 올라갔고 대법원은 웡의 손을 들어줬다. 이 판결을 계기로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은 국적과 인종, 부모의 체류신분에 관계없이 미국 시민권자라는 원칙이 확립됐다.
연방 수정 헌법 14조는 남북 전쟁 도화선의 하나가 된 ‘드레드 스캇’ 판결을 뒤집기 위해 제정됐다. 연방 대법원은 1857년 노예제를 금지한 일리노이로 이주한 흑인 노예 드레드 스캇이 자신이 더 이상 노예가 아니며 이를 인정해 달라고 낸 소송에서 노예의 자녀는 거주지를 옮겼다고 시민이 될 수 없으며 출생지에 관계없이 노예라고 판시했는데 14조는 헌법 수정을 통해 이런 판결을 원천 봉쇄한 것이다.
14조에는 이밖에도 “국가는 ‘적법 절차’ 없이 사람의 생명과 자유, 재산을 박탈할 수 없으며 모든 사람은 법의 평등한 보호를 받는다”고 규정해 권익 신장을 위한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다. 이 조항에서 주목할 것은 ‘적법 절차’와 ‘평등한 보호’를 받는 대상이 ‘시민’ (citizen)이 아니라 ‘사람’ (person)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미국 법의 관할권 아래 있는 사람은 체류 신분에 관계없이 똑같은 권리를 보장받는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시민권자가 아니기 때문에 투표를 통해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없었던 중국인들은 이 조항을 적극 이용했다. 19세기 말 미국 내 중국인 인구는 11만 정도로 추산되는데 이들이 자신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소송을 제기한 건수가 1만건에 달한다. 다 이기지는 못했지만 이들이 평등한 대접을 받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투쟁했는지 알 수 있다.
그 동안 출신 국가별로 나뉘어져 있던 아시안들을 단합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1982년 일어난 빈센트 친 살해 사건이다. 미국 자동차 산업에 타격을 준 일본인으로 오해해 친을 살해한 미국인들은 “감옥에 갈만한 사람들이 아니다”라는 판사의 말과 함께 집행 유예로 풀려났다. 분노한 아시안들은 한 목소리로 이 판결을 규탄했고 이들의 조직적인 항의는 ‘증오 범죄 방지법’ 통과로 이어졌다.
이런 역사를 돌아 보면 우리가 누리고 있는 권리 중 거저 얻어진 것은 없다. 모두 선조들이 온갖 차별과 박해를 견디며 힘들게 싸워 얻은 것이다. 권익 신장에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는 수정 헌법 14조도 노예 해방가들이 남북 전쟁이란 대가를 치르고 쟁취한 것이다.
이런 혜택을 누리며 살고 있는 우리가 해야할 최소한의 일은 이들의 희생과 노고를 기억하고 아직도 남아 있는 차별을 없애는데 작은 힘을 보태는 것이다. “역사를 잊는 자는 그걸 되풀이하는 벌을 받는다”는 산타야나의 경구는 아직 유효하다.
민경훈 | 논설위원 (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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