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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오키프
Georgia O'Keeffe (1887~1986)
- 미디어2 (web@koreatimes.net)
- Jun 01 2021 04:53 PM
사막의 은둔자, 광활한 자연과 합일된 위대한 화가 장르를 초월한 자유인

▲ 조지아 오키프
오키프 작품의 주제는 꽃과 동물의 뼈 등 자연물이 주류다. 특히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거대한 캔버스에 그려진 확대된 꽃은 관람자를 압도시킨다. 투명하고 얇은 색감에도 불구하고 그 깊이감은 신비롭고 환상적이다.
20세기 초 유럽의 예술사조에 흠뻑 빠져있던 미국화단에 그는 자신만의 독보적인 화풍으로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이미 살아생전 거장으로 미국 모더니즘의 대표화가로 인정받았다.
조지아 오키프는 1887년, 미국 위스콘신주 선프레리(Sun Prairie) 근처의 한 농장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혁명으로 몰락한 헝가리 귀족과 대기근으로 미국에 이민을 온 아일랜드계 농민의 딸이었다.

▲ Ram's Head, White Hollyhock-Hills/Oil Painting/1935/Collection of the Brooklyn Musuem.

▲ 펜더널 언덕과 흰독말풀/ 1940
1904년 시카고미술학교, 1907년 뉴욕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공부했고, 졸업후 1913년부터 1918년까지 텍사스 등의 학교와 대학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이때까지의 인생은 미술을 공부한 대개의 평범한 여성들과 다르지 않다.
그의 인생은 1916년 사진작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 미국의 사진작가, 1864~1946)를 만나면서 새롭게 시작된다.
무명화가인 오키프의 그림을 선물받은 친구가 뉴욕의 예술계에 주름잡던 스티글리츠에게 작품을 소개한다. 스티글리츠는 오키프의 그림을 보자 놀라며 '마침내 여자도 그림을 그릴 줄 알게 되었군'이라 말했다. 그는 바로 뉴욕 ‘291 갤러리’에 전시를 주선했고, 대단한 성공이었다.
세계적 거장들의 작품과 나란히 한 오키프의 그림은 독특한 매력을 발산했고,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으며 화단의 주목을 받게 됐다. 결국 스티글리츠에 의해 화단에 소개된 그는 생애의 전환점을 이루어 미국의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서게 된다.
스티글리츠는 스트레이트 포토(Straight Photography)와 사진분리파 운동을 주장하며 당대 사진계의 거장으로 떠오른 인물이었다. 또한 1905년부터 뉴욕에 '291갤러리'를 열고 유럽의 거장들 - 파블로 피카소, 폴 세잔느 등 - 의 작품을 미국에 소개하고 있었다.
오키프는 스티글리츠의 사진과 함께 단번에 미술계의 중심으로 떠올랐으며, 그로 인해 그림도 잘 팔렸지만 그는 이러한 세간의 거북한 평판과 가십의 주인공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더욱이 자신의 작품에 대한 ‘가벼운’ 평가는 참을 수 없었다.

▲ My Front Yard, Summer /1941

▲ Cedar Tree with Lavender Hills/ 1937
그러나 오키프는 이에 직접 나서기 보다는 묵묵히 자신의 작품세계를 그려나갔다. 특히 1917년 콜로라도 여행에서 처음으로 뉴멕시코 고원의 사막과 깊은 계곡을 본 그는 강한 영감을 받고 뉴욕과 뉴멕시코를 오가며 작품활동을 이어나갔다. 특이한 형태의 바위나 강렬한 햇빛에 새하얗게 육탈된 동물의 뼈 등을 작품에 담았다.
오키프와 스티글리츠는 1918년부터 연인이 되었고 1924년 결혼했다. 스티글리츠가 51살 오키프가 28세였다. 스티글리츠는 자신의 부인이 된 미국의 대표적 표현주의 화가 오키프를 1920년대부터 사진에 담았다.
그는 오키프를 집과 스튜디오 그리고 그녀가 머물고 있던 뉴멕시코 등지에서 누드를 비롯 초상사진으로 그의 일상적인 삶을 기록했다. 사진은 그전까지 유행하던 초상화만 몰아낸 것이 아니라 여성의 육체를 묘사하던 누드화와 성애(性愛)화의 몰락을 가져왔다.
스티글리츠는 오키프와 예술혼을 서로 교감하며 작품을 만들어냈고, 그런 두 사람의 관계는 때때로 작품 속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스티글리츠는 그녀의 작품들이 지니고 있는 세계 중 특히, <꽃> 시리즈에서 느낄 수 있는 섬세함, 예리함과 동일한 느낌을 자아내도록 렌즈에 담았다. 뉴요커들의 관심은 오키프의 작품보다는 아름다운 그의 몸이었다.

▲ My Back Yard/1937
1946년 인생과 예술의 동반자였던 스티글리츠가 사망하자 오키프는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뉴멕시코 산타페로 완전히 이주한다. 광활하고 고독한 사막에서 그는 외부와의 관계도 멀리하고 자신의 작품세계에 몰두하며 수작들을 쏟아냈다. 1986년 산타페에서 숨질 때까지 '애비큐Abiquiu’의 집과 ‘고스트 랜치’ 목장을 오가며 작품활동에 전념했다.
전화는 물론 전기와 수도시설조차 없는 문명의 변방에 스스로를 유폐시켜 은둔했다. 오키프는 어떤 특별한 정치적 몸짓이나 페미니즘적인 행동을 두드러지게 한 적은 없다.
“어느 날 문득 나는 여자라는 이유로 내가 원하는 곳에 살 수도 없고 갈 수도 없으며 하고 싶은 것을 할 수도 없음을 알게 되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 자신에게 진짜 중요한 것,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 바로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후기작품들은 추상성이 강조되고, 사물을 패턴화하여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띄고 있다. 특히 전후 미국미술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평면성’의 요소를 함축하고 있다.
오키프는 98세라는 긴 삶을 살았는데, 노년에도 작품활동을 열정적으로 이어나갔다. 여든 후반에는 이십대의 젊은 연인 ‘존 해밀튼’과 함께 사랑 이상의 우정으로 여생의 동반자로 삶을 채웠다. 노안으로 사물을 자세히 보기 어려워지자 점토로 도자기 등을 만들었다.
1986년 사망한 오키프는 유언대로 자신이 사랑했던 뉴멕시코 고스트 랜치 근처에 한줌의 흙으로 뿌려졌다. 그의 초월적인 시각의 작품들은 사물을 보는 새로운 방법을 가르쳐주며 극사실주의와 팝아트 등 미국의 현대미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정리/주간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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