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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쿰세(Tecumseh)의 생애와 저주’<1>
손영호 | 칼럼니스트
- 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editorial@koreatimes.net)
- Jun 15 2021 04:00 PM
■ 들어가는 글
2012년에 개봉된 미국 최정예 특수부대 해군특공대(NAVY SEAL)의 실제 활약상을 다룬 영화 '액트 오브 밸러(Act of Valor)'에 다음과 같은 명시(名詩)가 영화 전편에 걸쳐 부분적으로 등장한다. 여기에 그 전문을 인용해 본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인생을 살아라. 남의 종교를 욕하지 말고 모두의 의견을 존중하며 너 또한 그들에게 존중을 받아라.
너의 인생을 사랑하고, 완벽하게 만들고, 아름답게 하여라. 오래 살도록 노력하고 이웃을 돕고 살아라. 결단의 순간이 오는 날을 위하여, 늘 고귀한 죽음을 준비하라.
친구를 만날 때나 떠나 보낼 때, 심지어 그가 외로운 이방인일지라도, 경의가 담긴 인사를 해주어라. 모든 사람에게 존중을 표하고 아무에게도 아첨하지 말라.
매일 아침 일어날 때 양식과 삶의 즐거움에 감사하라. 감사할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그 잘못은 오로지 너에게 있을 것이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악용하지 마라. 악용은 현명한 자의 통찰력을 빼앗아가 결국 그를 멍청이로 만든다.
죽음의 순간이 오더라도 남들처럼 두려워 말라. 남들처럼 엎드려 구걸하며, 조금 더 살게 해 달라며 추하게 굴지도 말라. 죽음을 환영하여라. 집으로 돌아가는 영웅처럼!
이 시는 북아메리카의 원주민 중 알곤킨 어족(語族)에 속하는 쇼니 (Shawnee) 족의 지도자였던 실존인물 테쿰세(Tecumseh, 1768~1813)가 썼다. 쇼니족 언어로 테쿰세(Tekoomse)는 '유성(流星, comet)', 혹은 '하늘을 가르는 표범'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는 전사戰士로서 통찰력있는 추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논리적이고 유창한 연설가였고, 쇼니족을 대표하는 정치인이었다. 미국, 캐나다가 모두 그를 자국민으로 간주하며 미국에서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자결권을 지키려 노력한 운동가로, 캐나다에서는 미국의 확장 야욕에 맞서 캐나다를 수호한 애국자로 각각 높이 평가한다.
■ 출생과 성장
테쿰세는 오하이오 주 칠리코테(Chillicothe)에서 1768년 3월에 태어났다. 그가 6살 때인 1774년 10월, 아버지가 무단 침범한 백인들과 싸우다 죽으면서 장남 치크시타(Chiksita)와 테쿰세에게 죽을 때까지 백인들과 타협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전통관습에 따라 어머니가 본가인 크릭(Creek)족이 있는 미주리로 돌아가자 어린 테쿰세는 큰이모의 손에서 자랐으며 8남매의 맏형 치크시타에게 교육받고 무예를 익혔다.
미국 독립전쟁(1775~1783)이 종료된 1783년 15살의 테쿰세는 원주민 인디언 땅을 침범하는 백인들과 수많은 전투를 벌이며 전사들의 지도자가 된다.
1789년 말에서 1790년 초까지 그는 형 치크시타와 함께 남부로 출장갔다. 이때 체로키 족에 속하는 치카마우가(Chikamauga)족과 사냥원정에 나섰다가 말에서 떨어져 대퇴부(넙다리, 넙적다리) 골절상을 입었다. 부상은 완치됐으나 그때부터 평생 다리를 조금 절었다. 그 후 치카마우가 족 추장 '질질 끄는 카누(Dragging Canoe)'의 배려로 거의 2년을 함께 지내는 동안 그의 딸과 결혼해 아이가 태어났지만 결혼 생활은 짧게 끝나고 아이는 엄마손에 맡겨졌다.
1792년 9월 북서 인디언 전쟁(Northwest Indian War, 1785~1795) 중 맏형 치크시타가 전사한다. 이 전쟁의 패배로 1795년 일방적으로 맺어진 '그린빌 조약(Treaty of Greenville)'에 의해 지금의 오하이오주의 2/3와 인디애나주 일부를 백인들에게 내주었다. 이는 인디언측에서는 삶의 터전 상실을 의미했다. 그러나 쇼니족 추장과 마이애미족 추장이 뇌물을 받고 동의했기 때문에 테쿰세는 조약의 실효성 인정을 거부했다.
■ 범부족동맹의 요지 '예언자의 마을'
한편 1775년 세 쌍둥이로 태어난 테쿰세의 동생은 의기소침하고 술로 지내다 이름을 바꾼 후 1805년 무렵부터 영적 계시를 받은 종교적 지도자, 즉 예언자(The Prophet)로 부상했다. 묵시에 의해 백인들은 멸망한다며 백인들의 관습, 예컨대 무기류, 주류, 유럽식 의상 등의 사용을 배척하고, 거래상들과 흥정할 땐 부르는 값의 절반만 줄 뿐만 아니라 미 정부에게 절대로 더 이상의 땅을 주지 말 것을 주장했다.
그의 말에 따라 전통적 삶의 방식으로 회귀하는 부족들이 모여들자 그들은 1805년 오하이오주 서부에 정착하려 했으나 미국과 평화관계를 원하던 쇼니족 추장 '검은 말굽'의 반대로 다시 북서쪽으로 이동했다. 이들은 국경지대의 백인 정착자들과 싸우면서 1808년 마이애미족 추장 '작은 거북'이 있던 5대호 남서쪽, 인디애나 주의 티피카누 강이 흐르는 지금의 라파예트(Lafayette)에 정착했다.
이곳은 정치·군사적 동맹의 요지로 테쿰세가 꿈꿔온 범부족동맹을 실현할 구심점이 되었으며 각지에서 무려 3천여 명이 몰려들었다. 백인들은 그들에게 커다란 위협이 된 이곳을 '예언자의 마을(Prophetstown)'이라고 불렀다. [계속]
손영호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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