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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무라토레 父子의 비극(하)
- 미디어2 (web@koreatimes.net) --
- 18 Jul 2021 03:04 PM
28년 전 아버지와 같은 식으로 아들이 죽다
▲ 알폰소.
▲ 1964년 1월 빈첸초 무라토레가 살해됐을 당시 호주 일간 헤럴드선 1면.
아들 프랭크보다 사위 알폰소를 더 아꼈던 리보리오는 알폰소에게 자리를 넘겨주려 했고, 그걸 모를 리 없던 프랭크는 줄곧 매제를 질투했다고 한다. 경찰 얘기다.
88년 리보리오가 죽자마자 알폰소가 권력과 사업을 포기하고 처가를 등진 사건은 충격이었다. 알폰소에게는 ‘옛사랑’이 있었다. 16세에 만난 14세의 카렌과 10대 시절을 함께 보낸 알폰소는 결혼 생활을 접고 귀향한 카렌에게 빠져들었다. 하루에 25번씩 전화를 걸고 1주일에 3번씩 집에 들르고 차 트렁크를 과일로 채우고 비싼 꽃을 선물했다. 아내와 진작 틀어진 마당에 장인이 세상을 뜨자 미련도 없어졌다.
무모한 열정(사랑)은 다른 열정(분노)을 자극했다. 알폰소가 이탈을 감행하기 전부터 벤베누토가(家) 형제들은 경고했다. “놀아도 좋지만 현관문이 어디인지는 기억하라”는 거였다. 당시 이탈리아 공동체는 남성의 외도에 관대했다. 자유주의가 아니라 가부장 문화 영향이었다. 다만 아내와 함께 살 때까지만 그랬다. 내연녀에게 가는 건 처가에 대한 모욕이다. 심지어 상대도 유별났다. 마피아 대부 가문이었다.
하지만 결정적 대립은 이권을 놓고 냉정하게 벌어졌다. 알폰소는 아내를 떠난 뒤 마피아 그늘의 시장에서도 퇴출됐다. 그리고 4년이 흘렀다. 그동안 알폰소는 사업에 두 번 실패했다. 시장에서 재기하고 싶었다. 시장밖에 없었다. 죽기 2주 전 비밀 회의에서 알폰소는 시장 최대 고객인 대형 유통업체 ‘콜스마이어’ 사람들을 만나, 지금보다 더 싼 값에 청과물을 납품할 테니 공조하자고 제안했다. 배신이었다.
이 자리에서 알폰소는 30년 가까이 명맥을 이어 온 마피아 상납 비리를 진술했다. 마피아는 뇌물을 먹인 콜스마이어 직원과 짜고 자기들이 돈을 뜯어내는 상인들의 제품만 공급되도록 시장과 유통업체 간 고리인 중간도매상에 압력을 넣는 수법을 썼다. 조직이 착복한 상납금은 유통 비용을 거쳐 소매 가격에 반영됐고, 소비자를 패자로 만들었다. 힘을 합쳐 이를 근절하고 거래를 트자는 게 알폰소의 제의였다.
2주만의 처형
사업이 위태로워지자 4년간 미뤄지던 처형이 2주 만에 집행됐고 배신자는 제거됐다. 결과적으로 폭로도 이뤄지지 않았다.
마피아 안에서도 침묵은 핵심 규범이다. 28년 전 빈첸초 살해 사건의 경우 결국 무죄를 피하지는 못했지만 기소된 피고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알폰소 사건은 깔끔한 미제다. 증언도 증거도 없고 기소된 피의자도 없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빈센조’는 해피 엔딩이었다. 이탈리아 마피아 카사노 패밀리 대부가 총애한 입양아 출신 한국계 변호사 빈센조(빈첸초가 원음에 가깝다)는 정말 아버지 같은 대부가 죽고 자신을 시기하던 그의 아들이 권력을 승계하며 잠시 피신하지만 무능한 새 보스가 위기에 빠뜨린 조직을 구해내며 화려하게 복귀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판타지다. 이탈리아 최대 조직 칼라브리아 마피아는 특히 가족을 표방하며 세계적 규모로 세력을 확장했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의 1월 보도에 따르면 보스 빈첸초 토르카치오는 5년간 페이스북 계정 ‘명예와 품격’을 굴리기도 했다. 이미지 포장을 위해서다.
알폰소가 피하지 못한 건 운명이 아니었다. 마피아 자장(磁場)의 강력한 인력이었다. 대를 이은 무라토레 부자의 비극이 잔혹하고 집요한 악행과 더불어 드러낸 마피아의 면모는 피해자와 조직원의 공포와 침묵을 자양분 삼는 그들의 질긴 목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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