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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의 해프닝
소설가 김외숙
- 권도진 기자 (press2@koreatimes.net)
- Sep 14 2021 08:11 AM
밴프에 사는 큰아들 내외가 온다고 한 것은 지난 초봄이었다.
4월 중으로 오겠다고 해서 3월부터 나와 내 짝은 기다리기 시작했다.
‘아들 내외 오면 우리 여행 가자.’
우리 집 큰아들 내외가 온다는데 토론토에 사는 여류 두 분이 난데없이 여행 가자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는데, 그러니까 아들 내외와 아버지가 오붓하게 시간 보내게 하고 나는 한 사나흘 휴가를 하라는 것이었다.
토론토의 그분들은, 연세 많은 짝과 사는 내가 자유도 없고 몸도 마음도 지쳤다고 여긴다. 사실 나는 구속된 것이 아니어서 비록 함께이기는 하지만 다닐 곳 다 다니고, 작품 쓸 것 다 쓰고, 몸도 마음도 건강한데, 그분들은 날 데리고 나갈 생각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4월에 온다던 아들 내외는 코로나 상황으로 미루고 미루다 지난 8월 중순에야 오는데 3박 4일 걸리는 먼 거리를 달려왔다.
결국, 한 사나흘 여행 계획은 하룻밤으로 줄어들어 나는 내 짝과 아들 내외의 배웅을 받으며 정말 엎어지면 코 닿을 나이아가라 폭포의 어느 호텔에서 토론토에서 온 두 여류와 함께 밤을 보내게 되었다.
침대에서 바로 폭포가 내려다보이던 12층의 방에 든 우리는 행여 그 밤이 후딱 가버릴세라 뭘 먼저 할까 궁리하다가 까르르 웃다가 수시로 빛깔을 바꾸는 폭포를 내려다보며 사진도 찍으며 금쪽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점점 밤이 깊어지면서 눈두덩이 자꾸 내려앉는데 그래도 자면 안 된다며 버티고 있던 꽤 늦은 시간이었다, 갑자기 화재경보가 ‘왜앵왜앵’하고 울리기 시작한 것은.
“뭔 소리야, 이게?”
분명 응급을 알리는 경보음이어서 눈가에 와 어른거리던 잠이 먼저 확 달아났다. 얼마나 벼르고 별러 한 외박인데, 침대에 누워 폭포를 내려다보겠다며 12층 높은 곳에다 방을 잡았는데 이 한밤중에 화재라고?
“다들 대피하고 난리야!”
“오 마이 갓, 정말이구나!”
갑자기 머릿속이 멍해지면서 생각이란 것이 멈추는 것 같았다. 뭘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던 와중에서도 내 본능은 이미 노트북을 끌어안고 있었다. 내 모든 작품이 든 것이었다.
이미 엘리베이터는 모두 멈췄고 우리는 계단을 걸었다. 너나없이 잠옷 바람이었고 내 품엔 노트북이 안겨 있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계단으로 덜덜 떨리는 다리로 걸으면서도 우리는 ‘도대체 이게 무슨 난리니? 살다 살다 별일 다 보겠다.’며 그 와중에 웃고 웃느라 걸음은 더 느리고 경보음은 멈출 줄 모르고 왜앵왜앵 귀를 찢었다.
드디어 건물 바깥으로 나왔을 때, 호텔 입구엔 어른, 아이 전 투숙객이 다 나와 있고 거리엔 여러 대의 크고 작은 소방차가 불을 번쩍이고 중무장을 한 소방관들은 건물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대부분 잠옷 바람이었어도 아무도 탓하는 사람 없었다. 밤 두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올려다본 호텔은 13층만 제외하고 모든 층이 어두웠다. 우리 방이 있는 바로 위, 13층에 뭔가 일이 생긴 것이 분명했는데 건물의 어디에도 연기도 불길도 보이지 않았다.
자던 잠결에 뛰쳐나왔을 사람들, 우리처럼 이 밤을 잠으로 보낼 수 없다며 버티다 내려온 사람들과 그렇게 호텔 입구에서 한 시간은 더 기다리는데 드디어 각자 방으로 가라고 했다. 알고 보니 화재가 난 것이 아니라 투숙객이 실수 또는 장난으로(?) 경보기를 건드려 생긴 일이라고 했다.
“뭐야?”
불이 나지 않아서 김이 빠졌다는 의미는 당연히 아니었고, 이 엄청난 일이 실수 또는 장난 때문이었다니 맥이 탁 빠지는 것이었다.
그 많은 투숙객들은 다시 계단을 통해 각자의 방으로 가야 했다.
우리 일행 세 여인은 12층까지 계단을 오르며 또 ‘살다 살다 별일을 다 본다.’ 라며 웃고 웃느라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겨우 12층에 당도했는데, 룸 키 둘 중에 엉겁결에 하나만 들고 나간 그 키가 말을 안 듣는 것이었다.
“끝내주는 밤이다, 정말!”
결국 셋 중 제일 젊은 여류가 12층을 한 번 더 걸어 내려가 프런트 데스크에서 새 키를 받아와서야 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 아직 살아 있는 거니?”
그랬다, 우리가 아직 귀신이 아님은 분명했다.
그러나 실수 또는 장난이 아니었다면, 폭포가 내려다보이던 12층의 우아한 방에서 외박을 즐기던 우리는 아마 이 밤의 죽음 일 순위였으리라.
잠자지 말자던 말이 씨앗이 되어 결국 밤을 홀딱 지새운 우리는 그 신 새벽에 또 까르르 까르르 웃어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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