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오피니언
장편소설 '엘 콘도르( El Co'ndor)' - (21)
김외숙 소설가
- 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editorial@koreatimes.net)
- Sep 23 2021 01:21 PM
“오늘 모임은 어땠소? 애나도 갔다면서?”
저녁 식탁을 물린 자리에서 아버지가 여상하게 어머니의 하루 일과를 물으셨다. 아버지는 어쩌면 부인들의 모임에서 오갔을, 들을 만한 새로운 정보라도 있을까 하고 물으셨을 것이었다.
“아, 글쎄, 미세스 길모어가 마이클과 애나를 중매하면 어떨까 하는 거예요.”
어머니가 하루 일과로 모임의 얘기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어서 나는 듣고만 있었다.
“파울의 둘째 말이요?”
뜻밖이라는 듯 아버지가 어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안 돼요, 엄마, 마이클은!”
그 때였다, 마치 어렸을 적에 마이클이 날 놀리고 있었을 때 어디선가 나타나 마이클에게 대들던 그 때처럼 브라이언이 대뜸 안 된다며 언성을 높였다. 식구들 시선이 브라이언에게로 향했다. 수아가 먼저 브라이언을 쳐다보았고 나는 눈을 내려 뜬 채 입술만 씹고 있었다.
“그건 다 지난 일이라 더구나.”
뜻밖의 갑작스러운 브라이언의 반응에 어머니가 순간 당황해 하며 에반스 부인이 하려던 것을 길모어 부인이 가로채어 대신한 그 말을 옮겼다. 마이클이 겪었을 시련에 대한 것이었다.
“그래도 안 돼요, 마이클은!”
브라이언은 완강했다.
“그래, 우리 애나에게 마이클은 그리 좋은 기억의 아이는 아니지.”
아버지도 거드셨다.
“마이클은 제가 알아요. 애나한테 만큼은, 자격 없어요!”
브라이언은 단호했다. 나는 내리 뜬 눈길을 들어 브라이언을 주시하고 있었다. 브라이언이 부인들 앞에서 내가 하고 싶던 그 말들을 식구들에게 나대신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끊는 일, 쉽지 않아요. 언제 또 손댈지 모른다고요.”
그 또한 맞는 말이었다. 오래 가까이 하다가 서서히 그 속에 빠져버렸을 음주습관을 어떻게 쉽게 잘라버릴 수 있을까? 그것도 낮에 길모어 부인이 말했을 때 내 속에서 불쑥 솟구치던 생각이었다. 그렇게 브라이언은 마이클과 내가 엮여서는 안 되는 이유를 조목조목 대며 나대신 나서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그 이유가 두 말 할 수 없도록 합당해서였을까, 아버지와 어머니가 입을 다문 채 브라이언을 쳐다보기만 하셨고 수아는 넋이 나간 듯 멍하니 브라이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브라이언이 대신하고 있고 일일이 옳은 말에 식구들이 말문을 닫은 채 브라이언을 바라보도록 한 이 상황을 지켜봐야 하는 나는, 몹시 불편했다. 마치 그 마이클과 손 쓸 수 없도록 이미 깊게 엮여버린 것처럼, 그래서 식구들 앞에 발가벗고 선 채 질타를 듣고 있는 것처럼 몸 둘 바 모르도록 민망했다. 바로 내 일이어서 할 말이 목까지 차올라도 나는 입 다물고 있는데 브라이언이 왜 저토록 예민한지, 왜 나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더구나 수아 앞이었다. 마치 내가 앞에 있음에도 나는 의식하지도 않은 채 마이클과 엮으려던 길모어 부인의 오지랖 같았다.
“브라이언 말도 일리가 있어. 술이 지천인데 끊는 일이 어디 쉽겠느냐고?”
드디어 아버지까지 브라이언 편을 들고 나서시니 더는 말을 못하고 난감한 표정을 하신 어머니가 내 눈에 천지에 의지가지없는 고아 같았다. 이 부당한 시추에이션에 내 속에 가라앉아 있던 반감이 불쑥 고개를 치켜들었다. 디에고 앞에서도 그러더니 내 일에 툭 하면 나서는 브라이언에 대한, 나도 그 정도는 알아, 하는 반감까지 더한 것이었다.
“만나 볼게요, 그 사람.”
마침내 내가 나섰다. 브라이언의 저 주제넘은 관여부터 자르고 싶었다. 하루 일과를 가족과 나누려던 어머니를 그렇게 몰아붙이듯 난감하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얼어붙어 버렸다.
“애나!”
어머니와 아버지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날 바라보고 브라이언은 날 향해 소리쳤다.
“철없었을 때의 일이잖아.”
늘 잠잠히 듣기만 하던 내가 브라이언과 대치하면서까지 내 목소리를 내자 아버지와 어머니, 수아와 브라이언, 모두 입을 다물어 버렸다.
“수다 중에 나온 얘기에 신경 쓸 것 없다, 애나야”
정중하게 자식들의 혼담제의를 받은 것도 아니고 또 브라이언이 반기를 들고 있는 상황에서 없던 일로 하고 싶었을 어머니가 수다라고 폄하하며 오히려 날 자제하려 하셨다.
“기회 있다면요, 어머니.”
그러나 나 또한 고집을 꺾지 않았다. 브라이언과 다르지 않았다.
“애나, 안 돼! 알잖아, 마이클이 어떤 인간인지.”
브라이언은 여전히 흥분한 채였다.
“내가 알아서 할 거야, 브라이언. 다들 그렇게 하잖아.”
고집을 굽히지 않는, 평소의 나답지 않은 모습에 모두 어리둥절한 채였다. 어쩌면 브라이언은 ‘떠나겠다.’고 한 이별 식 때의 내 말을 기억하고 내가 나 자신을 오기로 마이클에게 던지려하고 있다고 여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날 가장 많이 아는 브라이언이었다.
“그래도 마이클은 아니야!”
브라이언도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그 때, 주고받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수아가 슬며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 내 일에 브라이언이 지나치게 나서는 것에 대한 거부반응인 것 같았다.
“그래, 이건 다시 생각해 보자꾸나, 구체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까.”
갑자기 그 일로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아버지가 나서셨다.
“촉새 같은 미세스 길모어 때문에 이게 무슨 일이니?”
어머니는 그 일을 먼저 거론한 길모어 부인을 원망하고 있었다. 평화가 여름 햇살처럼 충만하던 집안에, 다정한 대화와 웃음소리가 오가던 집안에 아들과 딸이 대치 상황을 만든 사실을 못 견뎌하셨다.
실은 부인들의 대화가 그 자리에 있었던 본인인 내게는 거북했지만 과년한 자식을 둔 부모라면 얼마든지 나눌 수 있던 말들이었고 딸의 일이었으므로 부모님도 당연히 관심을 보일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안 된다고 하셨어야죠, 엄마!”
그런데 브라이언이 다시 어머니께로 원망의 화살을 쏘았다, 왜 적극적으로 길모어 부인의 말에 제동을 걸지 않았느냐는 원망이었다. 딸이 어렸을 적에 그토록 괴롬을 당했는데 왜 다시 그런 말을 듣도록 두고 보셨느냐는 원망 같았다.
또다시 아들로부터 원성을 들은 어머니는 멍하니 브라이언을 바라보고 있었다.
“브라이언 네가 너무 예민하게 그러는구나.”
이번엔 어머니 대신 아버지가 나서서 브라이언을 나무라셨다.
“수다로 그칠 줄 알았지. 그런데 애나가 원하는 일에 너도 지나치구나, 브라이언.”
급기야 어머니가 서운한 마음을 드러내셨다.
“그럼 그 때는 왜 애나 심정 모른 척하셨어요?”
브라이언이 ‘그 때’ 라며 다시 대들었다.
“그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동시에 브라이언을 향해 눈을 크게 떴다.
“그 때는 ‘노’라고 하셨잖아요?”
“그만 해, 브라이언!”
이번엔 내가 브라이언의 말에 제동을 걸었다. 아들의 사뭇 공격적인 말에 아버지는 정색을 했고 어머니는 입을 다무셨다.
날 핑계로 지난 일을 끄집어 올려 어머니를 괴롭게 하는 브라이언의 저 태도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은 어머니 앞에서는 마음껏 성질을 부려도 된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다 지난 일을 브라이언..”
어머니가 그 때서야 추리 하우스에서의 일을 떠올리신 것 같았다.
나는 도저히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어 일도 없이 부엌으로 갔다. 결국 나로 인해 일이 확대된 것이었다.
“애나 인생이잖아요.”
브라이언이 또 어머니께 대들었다.
“나는 그것밖에 몰랐다.”
어머니가 겨우 말하셨다. 브라이언 앞에서는 목소리를 높이지 못하시는 어머니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페루의 가족과 약속했다, 내 딸로 자라게 될 거라고. 나는 약속을 지키려 했고 그것이 애나의 행복을 지키는 일인 줄 알았다.”
어머니가 이제야 작정한 듯 이미 오래 전의 일을 브라이언 앞에 드러내셨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페루의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다는 말씀이었다.
“엄마는 다 몰라요, 마이클 때문에 애나가 얼마나 힘들어 했는지. 길가다 우연히 라도 마주칠까 두려워했다고요. 제가 정말 걱정 하는 건 행여 애나가 자신을 던지듯이 마이클에게.....”
브라이언이 말을 다 잇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가만히 있더니 일어서 위층으로 올라갔다. 아버지와 어머니만 그 자리에 앉아 계셨다.
‘던지듯이 마이클에게...’
브라이언의 말이 내 골수에 와 박혔다. 내 심정을 아는, 브라이언만이 할 수 있던 말이었다.
마이클은 내가 처음 학교에 갔을 때부터 피부빛깔과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유로 가장 심하게 놀린 아이였다. 가장 집요하게 가장 야비하게 놀린 아이라는 브라이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길 가다가 마이클을 만나더라도 무서워 마, 애나. 내가 있잖아.’
나는 그 브라이언을 믿었다. 내가 마이클에게 놀림을 당할 때마다 그 자리에 있었으니 브라이언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청년이 되어서는 술 때문에 치료를 받는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아무 근심 없을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 이른 나이에 무슨 이유로 술로 중독에까지 이르게 된 것인지 궁금해 한 적은 있었다.
치차를 즐긴 페루의 아버지와, 내가 입양 가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마리오 오빠도 술을 마신 사실을 떠올리며 어쩌면 마이클이 심성이 나쁜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아버지도 오빠도 나쁜 사람들이어서 술을 마신 건 아니었다. 속에 찬 울분을, 불만을 풀 방법을 달리 찾지 못한 탓에, 그러나 술은 늘 손쉽게 구할 수 있던 탓에 마셨을 뿐이었을 것이다.
마이클 속에도 풀고 싶은 갑갑한 무엇이 차 있어서 늘 가까이 있던 와인에 의지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다행히 같은 동네에 살면서도 우연으로도 마주친 적이 없었으니 마이클에 대한 관심은 그나마 그것이 다였다.
부엌에서 나와 부모님 곁으로 갔다. 모임에서 있었던 낮의 일을 얘깃거리로 올렸다가 자식에게 서운하고 난감한 지경을 겪으신 어머니는 눈을 감고 있었고 아버지는 입을 꾹 다문 채 앉아 계셨다.
“죄송해요, 아버지 어머니.”
부모님 앞에서 브라이언과 언성을 높인 일이 죄송했다. 어머니를 난감하게 해 드린 일은 더 죄송했다.
부모님 앞에서의 어깃장은 이미 브라이언만으로도 과했다, 그렇지 않아도 자식 일에 시달리신 분들이었다. 브라이언 앞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 심정을 다 알면서 누나가 그렇게 어깃장을 부리면 안 되는 일이었다.
“너 정말 그 심정으로 마이클을 만나려고 했니, 애나야?”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가 날 바라보셨다. 부모님의 얼굴이 낮게 내려앉은 구름조각 같았다.
“어머니!”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앞 뒤 사정 다 알면서 내 속에서 일어난 감정에 내가 휘둘리다가 내가 다스리지 못해 흘렸으니 내 책임이었다.
“애나야, 네 심정 살피는 일에 소홀했구나, 우리가.”
매사에 말을 아끼는 아버지가 말하셨다.
“내 딸, 우리는 예전처럼 함께 웃고 지내면 웃으면서 살게 될 줄로 알았단다.”
이번엔 어머니가 팔을 벌려 날 안으며 말하셨다.
‘함께 웃고 지내면 웃으며 살게 될 줄..’
그것이 고문일 줄은 나도 그 웃음 속에서야 알 수 있었다. 하물며 경험하지 않은 부모님, 오랜만에 만난 자식과 며느리, 그리고 곧 태어날 손자를 기다리는 기꺼움 속에서 행복한 부모님이 모르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이 먹었다고 다 알게 되는 건 아니구나, 애나야”
“암, 이렇게 자식 심정도 모를 때가 있는 걸.”
고백 같은 부모님의 진솔한 토로에 오히려 내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생각지도 않은 후회를 만든 하루였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쉬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부모님 앞에서 그것도 브라이언과 언쟁을 다 하다니, 나는 내가 몹시 못마땅했다. (계속)
www.koreatimes.net/오피니언
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editorial@koreatime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