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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엘 콘도르( El Co'ndor)' - (24)
김외숙 소설가
- 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editorial@koreatimes.net)
- Sep 28 2021 11:14 AM
그 마이클이 날 만나자고 해 나는 이곳에 와 있고 그가 먼저 와 있다면 어딘가 앉아 있을 텐데 나는 살피지 않았다. 저가 날 알아보고 찾아오면 모를까 내가 휘 둘러 찾아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나는 긴장을 풀기 위해 웨이터가 갖다 놓은 커피에다 우유와 설탕까지 넣어 한 모금 마셨다. 마이클은 아직 오지 않은 것 같았다, 내가 시킨 커피가 오도록, 우유를 넣고 설탕을 넣어 젓고 한 모금 마실 때까지 여기저기 앉은 사람 중에 아무도 날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수영을 마친 후 가끔 어머니와 이 라운지를 찾을 때가 있었다.
‘애나야, 난 돈 주고 마시는 커피가 더 향기롭더라.’
이곳을 찾을 때마다 어머니와 나는 공모자처럼 한 마음이었다. 작고 사소한 것에 한 마음이 되면 어머니는 소녀처럼 까르르 잘 웃으셨다.
“혹시 애나 힐스?”
그 때였다. 어머니와 이 자리에서 커피를 즐겼을 때처럼 마이클도 잠시 잊은 채 달달한 커피를 음미하고 있는데 한 남자가 내 이름을 불렀다. 체구가 우람하고 짧은 구레나룻이 뺨을 덮은, 장정이었다. 그 때서야 생각에서 깨어나며 내가 지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음을 상기했다.
“마이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몹시 겸연쩍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몹시 반가워하는 것 같기도 한 표정을 한 채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 앉아도 될까?”
그가 내 허락을 받고 있었고 이건 마이클의 행동은 아닌데? 하는 생각을 나는 순간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럼.”
내 말과 동시에 마이클이 의자를 약간 물려내어 내 건너편에 앉았다. 가슴이 몹시 두근거리기도 하고 떨리는 것도 같았는데 나는 깊게 숨을 한 번 내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실은 들어올 때 봤는데 긴장 푸느라 좀 앉아 있었어.”
마이클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친절했다.
‘너도 긴장할 줄 아니?’ 하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솔직한 표현이어서 내가 마이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이클은 너무나 변해서 길가다가 스쳤다면 알아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우연히 라도 만날까 한 걱정은 기우였다.
“사과하고 싶었어, 애나. 미안해. 참 부끄러운 일이었어.”
마이클은 성질이 좀 급한 편인지 커피도 시키기 전에 자세부터 가다듬더니 ‘미안’을 말했다. 오랫동안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던 사람의 진심어린 자세란 느낌이 들었다.
‘미안’
듣고 보니 남자에게 듣는 두 번째의 미안이었다. 그 날 눈 쌓인 새벽에 브라이언이 한 말도 ‘미안’이었다. 브라이언과 마이클의 ‘미안’은 의미가 달랐지만 들으며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미안’은 참 편리한 단어구나, 하고. 상대편 마음을 아프게 했어도 없던 일이듯 되게 하는 것이 ‘미안’, 이 한 마디였다.
그 짧은 한 마디의 힘은 강해서 오직 한 사람으로 알고 있던 브라이언이 내 눈 앞에 수아를 데려다 놓고 한 ‘미안’ 이란 말에 내 마음을 풀어야 했고, 어렸던 그 때부터 지금까지 날 따라다닌 불편한 기억이 내 속에서 여태 선명함에도 이제야 하는 ‘미안’에 나는 용서를 해야 했다.
‘사과는 받아야지. 그래도 애나야, 사과한다고 방심하지는 말아라.’
마이클의 전화에 나보다 더 경계심을 풀지 못한 어머니가 당부하신 말이었다. 마이클이 또 무슨 말로 내 마음을 할퀼까 어머니는 지레 걱정을 하셨다.
그런데 내가 방심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마이클의 ‘미안’을 듣는 순간, 아니 긴장을 말하고 커피도 시키기 전에 머리부터 조아리는 자세에 쌓인 오래 묵은 감정 같은 것이 ‘미안’에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어렸을 적의 일이기 때문이었다.
“많이 늦었지만 용서해 주겠니, 애나?”
마이클의 푸른 눈이 흡사 맑은 날 하늘이 내려앉은 것 같았을 때의 온타리오 호수 빛깔 이었다.
‘내 앞에서 정말 용서를 구하네? 이 사람이 정말 그 아이 마이클이라고?’
내가 나 자신에게 물었다.
마이클이 분명했다, 그 개구쟁이 마이클.
‘도대체 무엇이 그 마이클을 이렇게 변화시킨 거야?’
나는 또 나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믿을 수 없어서였다.
이즈음에서 나도 뭔가 말을 해야 하는데, 나도 할 말이 있다고 분명히 말했었는데, 이제 내가 그 말을 할 차례였다.
“우리가 다 어렸었잖아. 난 이 말을 하고 싶었어, 마이클 네게.”
어렸으므로, 철이 없었으므로 그럴 수 있었고 그래서 용서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어렸던 마이클의 눈에 내 외양은 얼마든지 호기심의 이유가 될 수 있었고 놀림의 이유 또한 될 수 있었다고. 내 눈은 마이클의 저 푸른 눈동자와도 달랐고 피부 빛깔도 생김새도 분명 달랐다. 나는 어렸던 마이클의 입장에 서 보며 철없던 마이클의 언행을 이해하기로 했다. 방심하지 말라던 어머니의 말은 잊은 채였다.
“오, 애나 고마워. 애나 넌 정말 멋진 어른이 되었구나!”
이미 긴장을 떨쳐버린 마이클의 목소리는 유쾌했다.
‘마이클, 너도 많이 변했는데 뭘.’ 하고 나는 속으로 말하고 있었다. 수많은 시간 동안 속에다 그 깊은 반감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나는 빨리 놓아버렸다. 그러지 말라고 어머니가 당부를 하셨음에도 작정했던 것보다 빨리 내 마음의 경계를 풀어버린 것이다.
그 개구쟁이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게 하고 사과를 할 줄 알게 하는 청년으로 변화하게 한 것은 정말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시간이었다. 하면 안 된다고 했어도 멈출 줄 모르던 행동을 후회하게 하고, 미안하다고 할 줄 알게 한 것, 그것은 시간일 것이다. 마이클과 내 앞으로 지나간 시간, 그 긴 시간이 ‘미안’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했고, 그 시간이 어렸기 때문이란 ‘이해’를 할 마음의 여유를 품게 한 것이다.
“같은 동네에 살면서 어쩌면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을까?”
신기하다는 듯 마이클이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마주친 적이 없었으니 내게는 다행이었다. 만일 길 가다가 또는 레스토랑에서든 어디서든 갑자기 부딪쳤다면 이런 ‘미안’의 기회는 없었을 것이고 나 또한 시간 속으로 기억을 흘려보내는 작업은 가능치 않았을지도 모른다, 계속 마이클을 싫어했을 것이므로.
“그러게.”
나는 마이클의 말에 슬쩍 동조했다. ‘미안과 용서’의 순간을 살짝 넘기고 나니 많은 숨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마이클과 나 사이엔 같은 동네에서, 같은 학교에서 공부한 공통의 이야기들이 있었다.
마이클은 말하면서 ‘넌 어떻게 생각해?’ 란 말을 몇 번이나 물었다. 그것이 마이클의 말의 습관인 것 같았는데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이면 좋겠는데..’ 하는 마이클의 희망사항 같은 의미여서 그럴 순간마다 나는 그냥 웃었다.
“애나, 나는 널 또 만나고 싶은데 넌 어떻게 생각해?”
헤어질 즈음에 마이클이 또 그렇게 말했을 때는 나는 순간 갈등했다, 사과만 받고나면 더 이상 마이클을 만날 일은 없을 거라고 어머니 앞에서 장담한 그 말 때문이었다. 그 때는 정말 내 마음이 그랬었다, 내가 마이클을 더 만날 일은 결코 없다고, 내가 어떻게 마이클을 더 만날 수 있겠느냐고.
그런데 내 마음이 갈등하고 있는 이유,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내가 마이클의 청을 거절하고 싶지 않은 데 있었다. 아니, 또 만나고 싶었다. 한 번 더 만나보고 아니다 싶으면 그 때 ‘노!’ 라고 해도 늦지 않을 거라는 합리화를 하며 나는 마이클을 향해 웃고 있었다.
‘싫어.’란 말이 아니어서인지 마이클의 표정이 어린 아이처럼 밝아졌다. 그래서 마이클이 다잡아 확인하듯이 ‘우리 또 만날 거지?’ 하고 물었을 때 ‘그러지 뭐.’ 하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집에 오는 길에 생각해 보니 생각보다 내가 많이 웃은 것 같았다. 마이클을 만나 많이 웃다니, 그것도 시간이 만든 요술일까?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너 괜찮니, 애나야?”
그렇게 마이클을 만나고 왔더니 어머니가 문 앞에서 기다리셨다.
어머니의 두 눈은 호기심과 걱정으로 뒤섞여 있었다. 딸이 행여 또 상처를 받았을까봐, 그래도 이젠 성인이 된 남녀의 만남이라 약간의 호기심도 있었을 것이다.
“첫 데이트 어땠어요, 애나?”
수아는 숫제 첫 데이트라며 어머니 곁에서 날 채근했다.
“그래, 얘기 좀 해 다오, 애나야. 우리가 너 오기만 기다렸단다.”
“다른 사람 같았어요, 마이클이.”
내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정말 그랬다, 호텔 라운지에서 서로 다른 테이블에서 기다렸는데 내가 마이클을 알아보지 못했고 마이클은 이미 날 알아보고 긴장을 다스리느라 조금 앉아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먼저 말했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어머니께 말했다.
“그러니까, 그 개구쟁이 마이클이 아니더란 말이지?”
“그건 마이클이 철없었을 때...”
어머니가 눈을 들여다보며 다그치자 내가 엉겁결에 한 것이 마이클을 변명하는 말이었다. 어머니를 향해 마이클을 변명하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감도는 것도 희한했다. 마이클을 기억하며 마이클을 말하며 미소를 짓다니 나는 상상도 하지 못한 내 모습이었다. 어머니가 내 눈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 눈에서 색다른 느낌을 발견한 눈빛이었다.
“다행이다, 마이클이 좋은 청년으로 성장해서. 에반스 여사가 마음고생을 많이 했는데 이제 다 지나간 얘기구나.”
어머니가 안도하셨다.
“한 번 더 만나보려고요, 어머니.”
“애나야!”
어머니가 날 불러놓고는 말을 잇지 못하셨다. 다시는 만날 일 없다고 해 놓고 어떻게 된 거야, 하는 질책 같기도 하고 딸 심경의 변화에 놀라신 의미 같기도 했다. 수아는 함빡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마치 그 심정 안다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브라이언의 완강한 반대에도 날 던지듯 불쑥 마이클을 만나보겠다고는 했었지만 그 뒤 나는 그 일을 잊고 있었다.
‘지난여름, 길모어 부인의 말을 듣고 전화를 하고 싶었는데 실은 용기가 나지 않았어. 내가 애나에게 잘못한 일이 너무 많잖아.’
마이클이 한 말이었다. 그러니까 마이클은 이미 길모어 부인을 통해 그날 부인들 모임에서 오간 얘기들을 들어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 딸이 ‘노’를 할 수 없었구나. 그래, 그 심정 나도 이해는 할 것 같아. 그러나 서두르지는 말자.”
어머니가 평소에는 보인 적 없던 내 고조된 심정을 지그시 가라앉히시는 것 같았다.
그렇게 만남이 잦아짐에도 나는 ‘노!’를 해야 할 적당한 기회는 잡지 못했다.
내 마음이 마이클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변화된 마이클을 만나면서 마치 애초부터 몰랐던 사람인 듯 점점 호기심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었다.
오랫동안 깊은 반감만 품고 있던, 그리고 한 번도 브라이언이 아닌 남자에 대해 관심을 가져본 적 없던 내게 마이클에 대한 호기심은 파격적인 심경의 변화였다. 수아를 만났을 때의 브라이언의 심정이 이랬겠다, 하는 생각을 나는 그 때서야 하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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