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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엘 콘도르( El Co'ndor)' - (25)
김외숙 소설가
- 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editorial@koreatimes.net)
- Sep 29 2021 10:22 AM
11. 첫 키스
마이클의 일이 끝나는 시간이 곧 우리가 만나는 시간이었다. 함께 드라이브한 후 식사하고 주말엔 영화를 보러 다녔다. 아직 겨울이 미적대고 있어서 우리가 만나 할 수 있는 것은 그 정도였는데 마이클은 여태 내 눈치를 보느라, 나는 아직은 마이클을 더 알아야 한다는 마음을 앞세우느라, 그리고 맘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노’ 라고 해야 한다는 약간의 강박관념을 속에다 둔 탓에 서로가 성큼 다가가지 못한 채 주저하고 조심했다.
마이클은 겨울이 물러나면 파크웨이를 따라 자전거를 타자고 하더니 너랑 어서 보트를 탔으면 좋겠다며 아직은 겨울인데 여름을 기다렸다. 마이클은 우리의 만남이 여름까지 갈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마이클을 만나기 전까지 내가 아는 남자의 세계는 브라이언이 전부였다. 브라이언과 자라면서 함께 경험한, 그래서 대부분 나도 너무나 잘 아는 세계였다. 그러나 브라이언이 들려준 이야기들이었으므로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들도 내 마음은 늘 그 속에 빠졌었다. 아마도 브라이언에게 빠졌을 게다.
마이클도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이야기로 솔깃하게 하는 것, 그것은 남자들이 여자와 가깝고 싶을 때 하는 그들 나름의 연애방법일까? 브라이언도 수아와 사귈 때 그렇게 접근했다고 했었다, 오죽하면 수아가 브라이언을 일러 세헤라자데라고 했을까?
그러나 마이클이 내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내가 몰랐던 세계의 것이었다. 다른 환경의 가정과 가족의 이야기, 브라이언과는 다른 성장 과정의 이야기, 다른 취미와 일 이야기, 심지어는 알콜중독과 치료 이야기까지였다.
마치, 할 이야기는 많은데 그 동안 들어줄 사람이 없었구나, 하는 착각마저 들도록 마이클이 내가 경험한 세계와는 다른 이야기들을 들려주면 브라이언의 이야기에 수아가 그러했듯이 나는 마이클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아직은 마이클이란 사람보다는 그의 이야기가 나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는데 그것은 곧 내가 마이클을 향해 점점 마음을 열어가고 있다는 의미였다.
마이클도 나와 같은 심정이었던지 헤어질 때는 늘 말했다, ‘애나와 함께 있으니 시간 가는 줄 모르겠네.’ 라고. 그러면서 ‘내일도 만나고 싶은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 라고 하며 내 생각을 확인하고 대답을 듣고야 그날의 만남을 마무리했다.
이미 둘 다 성인인데 다음 약속을 받아내는 방식은 어린 아이들 같았다. 어린 아이였을 때 그 때 만일 사이가 좋았다면 만나고 헤어질 때 그런 말투를 썼을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언어 습관을 통해 마이클이 생각보다 순진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아무리 마이클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켜켜로 쌓아두고 있었다할지라도 바로 내 앞에서 눈을 들여다보며 매일 저렇게 묻는다면 나는 결코 ‘노!’란 대답은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노!’는커녕 자주 만날수록 그를 더 알고 싶은 호기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이클만큼이나 나도 만남을 원한다는 의미였다.
처음 만난, 오래된 그 호텔라운지에서 우리는 자주 만났다. 파이어 플레이스를 가까이 두고 우리는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며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몰랐다.
‘내가 엉클 테드를 많이 따랐어.’
그 날은 마이클의 삼촌, 테드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의 동생, 테드는 독신으로 살며 마이클이 어렸을 때부터 자식처럼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나는 엉클이 하는 모든 것을 따라하고 싶었어. 낚시를 잘 했으니까 낚시를 잘 하고 싶었고 스키를 잘 탔으니까 겨울을 기다렸지. 엉클은 사냥도 즐겼어.’
‘너도 사냥했어, 마이클? 총으로 짐승을 죽였어?’
나는 이미 머릿속으로는 무심히 열매를 따고 있는 사슴의 머리에다 마이클이 총구를 겨누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이지 끔찍한 상상이었다.
‘노, 노, 애나, 난 사냥을 아주 싫어해!’
마이클이 어린 아이처럼 정색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사냥엔 따라가 본 적도 없어. 실은 내가 겁이 좀 많거든. 엉클이 낚시 갈 때는 늘 나를 데리고 다니셨는데 다만 낚싯밥으로 지렁이 꿰는 일은 절대로 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이었어. 내가 지렁이도 싫어하지만 살아 움직이는 걸 그렇게 하는 걸 아주 끔찍해 했거든. 그러면 엉클이 그러셨지, 마이클, 지금은 가게에서 낚시용 지렁이를 손쉽게 사지만 내가 너만 했을 때는 밤중에 잔디밭에 나오던 지렁이를 잡아서 낚시 갔단다, 하고’
그러니까 지렁이도 만지지 못하는 사람이 짐승을 총으로 쏘는 일을 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어서 나는 마이클의 그 말을 믿었다.
총으로 짐승 잡는 일을 꺼려하기는 마이클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여서 엉클의 사냥 습관을 못마땅해 했지만 정부에서 라이선스로 허락한 일이라며 때 되면 북쪽지방으로 사냥을 떠났다고 했다.
‘총은 가족이라도 손대지 못했어. 엉클은 자신의 집의 정해진 장소에다 잠금장치가 있는 박스에 넣어 보관을 했는데 행여 호기심을 가질까 내게는 총을 보여준 적도 없었어. 뭐든 따라하고 싶어 한다는 걸 엉클도 알고 있었거든.’
‘나 같으면 사냥은 절대로 따라가지 않을 것 같아.’
무심하게 놀고 있는 사슴을 향해 총을 겨누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끔찍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엉클이 하는 건 다 좋아했는데 사냥만큼은 절대로 따라하고 싶지 않은 엉클의 취미였어. 내가 만일 한 번이라도 엉클을 따라가고 싶었다면 아마 개미가 되고 싶어서였을 거야.’
‘개미? 아!’
말의 의미를 얼른 알고 내가 엉겁결에 감탄의 소리를 냈다. 마이클이 동화 얘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뭇잎을 떨어뜨려 물에 떠내려가던 개미를 살려준 비둘기가 어느 날 사냥꾼의 총에 맞을 위기를 맞자 비둘기 덕에 살아난 개미가 사냥꾼의 바지 속에 들어가 살갗을 깨물어 비둘기를 구하며 은혜를 갚는다는 이솝의 우화였다.
한 편의 우화를 응용한 마이클의 말을 들으며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마이클은 책을 많이 읽었구나, 그리고 읽은 이야기를 적용하여 말을 재치 있고 설득력 있게 할 줄 아는 사람이구나, 하고. 그리고 여차하면 ‘노!’라고 해야 하는데 이러다가는 ‘노!’를 못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그 속에 내가 몰랐던, 정말 알고 싶었던 그의 따뜻한 심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상하게 했을 ‘개미’란 단어 하나가 마이클을 더 유심히, 그리고 흐뭇한 심정으로 바라보게 했다. 그 작은 개미 한 마리에 의해 내 속에다 오래, 깊이 박힌 비호감이란 뿌리가 맥없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파크웨이를 드라이브하다가 강가에 자동차를 세우면 자동차는 우리만의 공간이었다. 자동차는 음악 감상실이었고 들고 간 커피가 있는 커피숍이었고 아직은 그럴 사이는 아니지만 또 어떻게 아는가, 첫 키스의 공간이 될지는.
온타리오 호수와 나이아가라 강에는 늦봄부터 초가을까지 모양도 기능도 다양한 보트들이 등장하는데 아직은 공기가 차가워서 사람들은 보트를 들여놓은 채 철이 오기를 기다렸다. 강물에는 보트들 대신 구스 와 다른 새 떼들이 찬 물에 떠 가끔은 엉덩이를 치켜들고 물속으로 들어가 고기를 잡았다.
“여름엔 보트를 타.”
바람에 이는 잔물결과 그 물결을 타고 새떼가 물결에 따라 일렁이며 떠있는 강을 내다보며 마이클이 말했다.
“보트엔 몇 가지의 종류가 있어. 물속의 모터사이클이라 불리는 시 두(Sea Doo)가 있고, 모터를 배 뒷부분의 바깥에다 장착하는 아웃보드(Outboard), 모터를 배 앞부분의 안쪽에다 장착하는 인보드(Inboard), 그리고 평평한 사각형으로 갑판에다 차양을 두는 폰툰보트(Pontoon Boat)라 불리는 것도 있어. 내가 즐기는 스피드 보트는 시가 보트(Cigar Boat) 라고도 하는데 모터가 주로 안쪽에 장착되어 있어. 날씨 따뜻해지면 나랑 타자. 애나도 좋아하게 될 거야.”
아무래도 마이클은 우리가 여름에도 함께 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을 하는 것 같았다.
“틴 에이지 때부터 술을 마셨어.”
마이클이 갑자기 술 이야기를 했다. 작은 동네에서 소문으로 퍼져 내 귀에까지 든, 마이클의 어머니 에반스 부인이 모임에서 고백하려다 만 그 일일 것이었다. 마이클의 지극히 사적인 일이라 나는 약간 긴장을 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처음엔 부모님 몰래 마시다가 나중엔 와이너리에서 집에서 어디서든 마셨어. 매일 마시다가 문득 나는 왜 늘 술을 마시지, 하고 생각을 한 적이 있어. 좋은 부모님이 계시고 하나 뿐인 성실한 형은 제 갈 길로 잘 가고 있었고 나는 식구들 사랑을 받으며 자랐고 그러니까 부족하거나 어느 하나 불만을 해야 할 일이 없었지. 불만할 수 없던 환경이 불만이었을까? 결국 나 자신 때문이었어.
나는 어렸을 때부터 지나치게 심술궂었고 심술이 심술을 부르며 더욱 강퍅해지고 그러다 보니 나 자신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는 것의 악순환이었어. 그런 나 자신을 회피하는 방법으로 처음엔 조금씩 마시다가 점점 빠져들었다가 나중엔 폭음을 했는데 내 주변에 술은 늘려 있었고 그걸 단호히 외면하기엔 내 의지가 너무나 약했어. 그러면서도 수시로 ‘도대체 무엇이 불만이야?’ 하고 자문을 하기도 했는데 원인은 늘 내 속에 있었어. 답은 아는데 푸는 과정의 인내가 부족했다고나 할까? 결국 나약함이 문제였어.”
마치 ‘이제는 애나 널 믿고 다 드러내고 싶어.’ 라는 듯 마이클은 속에 든 힘들었던 부분까지 쏟아내기 시작했다.
“보트 타기는, 나는 약하지 않다는 일종의 과시였어. 스피드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약함을 덮을 목적이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스피드로 물살을 가르고 공기를 가르다보니 내 고질적인 나약함도 다 날려버리고 싶다는 오기가 생기더라. 여름엔 물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잠시라도 술을 피하는 계기가 되긴 했어.”
알고 보니 마이클은 자신의 나약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많은 시도를 했던 것 같았다.
“나 자신을 좀 알고 있었던 것은 아주 다행이었어. 내 심약함을 가리기 위해 남을 괴롭게 하고 그도 성에 차지 않으니 술을 마시며 술기운 뒤에 숨는 일,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나 어리석고 유치한 방법이었는데 그 때는 내가 다른 방법을 몰랐어, 아니 부모님의 관심이나 좋은 가르침 같은 것이 있었지만 관심을 두지 않았던 거야. 좋은 길로 인도하려는 가족들과는 어긋나게 가는 것, 그렇게 어긋나면서 그것으로 가족을 긁고 날 긁었으니까. 자식 키우는 부모님의 행복감, 환상 같은 것을 내가 낱낱이 깨뜨리고 주저앉게 했을 거야, 그 때.
왜 이렇게 살지,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아, 하는 생각은 늘 따라다녔는데 그럼 어떻게 해야 해, 하면서 술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고 보트로, 자전거로, 뛰기로 날 내몰았어. 그 때는 내가 생각해도 참 모질게 마음먹었던 것 같아. 뭔가를 시도해 나 자신을 이겨본 적이 없었던 내가 날 알았던 것이 도움이 됐다고나 할까? 더 이상 그런 나 자신에게 휘둘리며 살고 싶지 않았거든.”
마이클은 조근 조근 자신의 지난했던 시간, 그러나 숨기고 싶었을 그 시간의 이야기를 내게 하고 있었다. 날 괴롭게 한 것 보다 더 많이 그런 자신에게 휘둘리며 힘들게 산 이야기였다. 한 심약했던 젊은이의 고통스러웠던 시간의 이야기였다.
그러함에도 그 이야기가 내 마음을 끈 이유는 그 고통에 휘둘리면서도 이겨내려 몸부림한 흔적과 마침내 이겨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고통의 이유를 타인이나 환경에 두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 마침내 자신의 단점을 극복한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마이클, 넌 아주 강한 사람이야.”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마이클이 심층에 묻어 둔 자신의 나약함까지 드러내자 나는 내가 경험으로 알고 있던 그에 대한 어렸을 적의 선입견을 자신의 나약함을 알고 극복한 강한 사람의 이미지로 바꿨다.
만일 마이클이 자신이 가진 점, 자신이 얼마나 누리고 사는지, 그래서 얼마나 자신감이 넘치는 남자인지를 내게 과시하려고 했다면 나는 아마 그에게서 인간적인 매력은커녕 또 실망만 느꼈을 것이다. 그에게서 시간이 만드는 인격의 변화는 결코 볼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이클 넌 대단한 사람이야, 너 자신을 이겼으니까.”
“나는 그렇게 널 괴롭혔는데 넌 원망대신 용기를 주네, 애나.”
마이클이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 그건 다 어렸기 때문이었다고.”
마이클이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널 만난 후부터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 나, 좀 유치하지?”
마이클이 씨익 웃었다. 정말 어린 아이 같았다, 아주 순진한 소년.
“응, 아주 순진한 보이 같아, 꼭 안아 주고 싶도록.”
진심이었다. 어두웠던 자신의 과거를 드러내는 일이 어디 쉬운가, 더구나 여자 앞에서? 어린 아이 같은 순수함, 진솔한 용기가 없으면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내 눈에 마이클은 근사한 사람이었다.
“지금, 나 안아주면 안 돼?”
마이클이 아이처럼 졸랐다. 귀여운 소년 같았다.
“그러지 뭐.”
내가 망설이지 않고 옆의 마이클을 안았다. 그리고 내 입술을 그의 이마에다 콕 찍었다. 내게 마이클은 장한 일을 해 낸 기특한 소년이었다.
내 가슴에 가만히 묻혀 있던 마이클이 이번엔 자신의 차례라는 듯 나를 안았다. 안은 채 가만히 있더니 자신의 입술을 내 뺨에다 조심스럽게 눌렀다. 내 뺨 위에서 잠시 주저하던 마이클의 입술이 이제는 소년이고 싶지 않다는 듯 내 입술을 찾았다.
내 입술을 만난 마이클의 입술이 잠시 머뭇대더니 이내 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년에서 마침내 한 남자의 입술이 되어 내 입술을 탐하기 시작했다. 내 입술이 기꺼이 마이클의 입술을 만났다. 우리는 이미 그 모든 과정을 거쳐 지금은 남녀로 만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우리가 입술로 하나가 된 것도 나이아가라 강가의 그의 자동차 안에서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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