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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엘 콘도르( El Co'ndor)' - (27)
김외숙 소설가
- 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editorial@koreatimes.net)
- Oct 01 2021 11:17 AM
14. 유월의 신부
양쪽 집안은 결혼식을 앞두고 몹시 분주했다. 결혼식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제의로 집 뜰에서 하기로 했다.
‘애나 결혼식에는 다 초대할 거야.’
특히 어머니는 아직 내게 혼담이 없을 때부터 말하셨다. 브라이언과 수아의 결혼을 섭섭하게 보낸 뒤여서 부모님은 내 결혼식엔 친구들과 비즈니스 동료들, 그리고 마을의 지인들을 초대해 집 뜰에서 야외 결혼식을 하기로 한 것이다. 초대받지 못했던 브라이언의 결혼식으로 부모님의 마음엔 여태 삭지 않은 서운한 감정이 남아 있겠지만 나는 브라이언에게서 들은 그 이유를 차마 부모님께 말씀드릴 수가 없었다.
마이클의 부모님은 나이아가라 강변에 위치한, 마이클이 결혼하면 주기로 한 집에다 신혼살림을 채우셨고 요리사를 불러 하객들을 대접하는 일도 하겠다고 했다. 리셉션에 쓰일 양가에서 빚은 와인과 샴페인은 넉넉히 준비되었다. 양가의 부모님은 같은 업종의 비즈니스를 하고 같은 동네에 사는 이유로 서로 친한 사이였고 동네 사람들이 하객이었다.
무엇보다도 브라이언이 축하를 해 줘서 나는 기뻤다. 나는 부모님의 딸, 브라이언의 누나로 이제 마이클에게 시집가는 것이다. 마음이 아무리 애절하고 간절했어도 더 질기고 더 강한 인연 앞에서는 지나가는 바람일 뿐이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너무나도 엉뚱한 사람과 인연이 맺어질 줄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브라이언도 나도 이제 그 인연의 길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각자 필연의 길을 가고 있었다.
유월초의 결혼식은 성대하고 아름다웠다. 본격적인 여름을 부르는 눈에 보이는 초여름의 자연은 골고루 풍성했다. 정원엔 어머니와 내가 가꾼 여러 빛깔의 장미가 넝쿨 따라 만발했다. 햇살 받은 온타리오 호수는 잔물결로 반짝였고 군데군데 세일보트가 돛을 올려 물결에 실려 가며 보트 위의 사람들은 손을 흔들어 축하했다. 현악 사중주가 연주하는 음악은 온타리오 호수에서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포도 밭 저 너머로 퍼져나갔다.
마치 우리 집의 충실한 집사처럼 늙어가고 있는 오크나무는 넉넉한 그늘을 지어 햇빛을 반기지 않는 사람들로 하여금 호수를 스치면서 식혀진 바람결까지 누리게 했고 나의 보물 상자, 추리 하우스는 오크나무 품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참으로 모를 것이 사람들 간의 일이야. 브라이언밖에 모르던 애나가 마이클에게 시집가네!’
‘하늘이 내린 인연을 이제야 만난 거지.’
‘행복해라, 애나야!’
‘암, 행복해야지, 우리 애나!’
추리 하우스와 오크나무가 주고받을 말이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입을 가리고 속삭일 것이다, ‘우린 너의 첫사랑과 이 순간까지다 품고 있을 거야.’ 하고.
드디어, 호수를 바라보는 큰 뒤뜰 양 쪽으로 나누어 세팅한 좌석 사이로 연주에 맞춰 아버지의 팔을 잡고 신부가 걸어 나오자 하객들은 숨을 죽였다.
나는 신부였다, 유월의 신부.
‘엄마, 마마니가 신부가 되었어.’
아버지의 팔을 잡고 걸으며 이 세상에 없는 페루의 엄마에게 말했다.
‘아버지, 마리오 오빠, 나 시집가요.’
그리고 나는 또 이 세상에 없는 아버지와 마리오 오빠에게도 말했다.
엄마와 아버지, 마리오 오빠가 ‘잘 살아라, 마마니. 행복해라, 우리 마마니.’ 하고 축복해 주는 것 같았다.
유월의 신부, 나는 검은 머릿결에 약간의 웨이브를 넣어 물결치듯 한 쪽 목덜미를 거쳐 어깨로 면사포와 함께 흘러내리게 했고 오래 전에 어머니가 입으셨던 백장미 빛의 드레스는 기품이 있었다.
결혼 날짜를 잡자 어머니는 웨딩드레스부터 사러 가자고 재촉하셨는데 나는 어머니가 간직하고 있던 그 옛날 어머니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싶다고 했었다.
‘애나야, 평생에 한 번 있는 결혼식이야. 가장 아름다운 걸로 하자꾸나.’
어머니는 나와 함께 웨딩드레스를 고르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다고 하셨다. 브라이언의 결혼식을 누리지 못하신 어머니는 내 결혼식에서 그 한을 다 풀겠다고 작정을 하신 것 같았다.
‘저, 어머니 웨딩드레스를 입고 싶어요.’
그러나 나는 어머니의 오래 된 웨딩드레스를 입고 싶었다. 그 드레스를 입고 어머니가 아버지와 그러하시듯 마이클과 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평소 실없는 말은 하지 않는 나의 은근한 고집을 아시는 어머니는 드레스를 사는 즐거움을 누리는 대신 당신이 입었던 오래된 드레스를 내 몸에 맞도록 고치는 일을 누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애나를 위해서는 침대커버를 만들지 않아서 미안했었는데 대신 웨딩드레스를 고쳐보자꾸나. 내 딸은 뭘 입어도 아름다울 거야.’
수십 년이 된 웨딩드레스는 어머니 손에서 나의 웨딩드레스로 거듭 태어나고 있었다.
그 웨딩드레스, 이미 유행이 지나 간 오랜 것이었지만 오늘의 주인공, 신부가 입었으므로 더 격조 있고 우아해 보였으리라.
거뭇하던 턱수염을 완전히 밀어버린 마이클은 푸른빛이 돌도록 산뜻하고 맑은 얼굴빛을 하고 짙은 턱시도차림으로 어우러져 귀공자 같았다. 도대체 마이클의 어떤 면 때문에 내가 그토록 싫어했던지 적어도 예식의 그 순간엔 내가 나 자신을 알 수 없었다. 과거는 환희 속에 다 묻혀버렸다.
딸의 손을 잡았던 아버지는 눈을 씀뻑이며 나를 한 번 꼬옥 안고는 사위 마이클에게 손을 넘겼다. 나는 방긋이 웃기만 할 뿐 눈을 치뜨고 마이클을 바라보지는 않았다. 내가 바라보지 않아도 마이클이 날 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곱다, 신부! 내가 생각해도 기막힌 중매를 한 것 같아.”
길모어 부인이 한 말이 현실이 되었으니 기막힌 중매였다.
기막힌 중매일 뿐 아니라 기막힌 예식이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초여름의 온타리오 호수로부터 불어오는 신선하고 온화한 바람과 따스한 햇살, 연초록의 나무들과 마음껏 피어오른 갖가지의 장미, 신부와 신랑, 그들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는 하객들의 넉넉한 표정들은 최고의 웨딩을 연출하고 있었다.
높은 흰 모자를 머리에 얹은 요리사들은 하객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했고 양가에서 빚은 와인과 샴페인은 넉넉했다.
브라이언과 수아 몫까지 더한, 근사한 웨딩이었다.
그것으로 애나 힐스로 성장한 나, 마마니는 이제 미세스 애나 에반스가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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