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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엘 콘도르( El Co'ndor)' - (28)
김외숙 소설가
- 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editorial@koreatimes.net)
- Oct 04 2021 10:12 AM
15.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나 아름다워서 눈물 났어요, 애나.’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통화 중에 수아가 한 말이었다.
자신의 첫 결혼식을 떠올렸을까? ‘눈물 났어요.’ 란 수아의 그 말이 내 마음에 걸렸다. 결혼식장에 유모차를 앞세운 여자가 들어와 신랑을 향해 ‘저 사람, 내 아이 아빠예요.’ 라고 했다던 그 결혼식이었다.
‘어떻게 감당했을까?’
신부에게 너무나 가혹했을 결혼식 날의 비극이었다. 그래서 더 미안했다, 행여 나까지 수아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까 봐.
수아가 또 말했다, ‘식구들이 모두 바삐 움직이던 일손을 다 놓아버린 것 같아요.’ 하고. 아버지는 ‘애나!’ 하고 부르려다 마시고 어머니는 아직도 수시로 ‘애나야!’ 하고 불렀다가 ‘내가 왜이러니, 애나는 가고 없는데.’ 라며 내가 없는 쓸쓸함을 자책하는 것으로 덮으신다고 했다.
‘브라이언도 많이 허전할 거예요.’ 라며 ‘함께 살았을 때는 너무나 고요해서 몰랐는데 빈자리가 나무나 커요, 애나.’ 하고 말했다.
‘브라이언도 정말 허전할까?’
누구보다도 허전할거라고 나는 감히 생각했다. 브라이언이 여섯 살, 내가 일곱 살이던 그 때부터 함께였다. 남매였고 친구였고 연인이었다. 여러 의미의 관계만큼이나 깊고 끈끈한 정으로 엮여진 브라이언과 나였다. 눈앞에서 떠났다고 어떻게 마음에서마저 털어버릴 수 있을까?
나는 미소 지으며 말이 많아진 수아를 그려보고 있었다. 늘 고요한 수아가 아무래도 내 몫까지 부모님과 나누느라 말이 많아진 것 같았다.
늦게 만난 친구 같은 수아였다.
수아에게는 차마 말로 드러낼 수는 없었지만 미안했다. 눈치가 없지 않은 수아가 브라이언이 사랑했다던 사람이 나였던 줄 왜 몰랐을까? 그렇지 않아도 낯설어 긴장했을 시집살이에 간간히 흘리던 브라이언과 내 눈빛, 그 눈빛이 뒤엉키며 일으킨 갈등은 또 얼마나 말 못할 고심을 만들었을까? 수아란 존재를 눈앞에다 두고도 여상하게 말하고 여상하게 웃어야 한 내 심정과 결코 다르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수아는 늘 고요했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나는 속에 찬 것을 그 눈 덮인 포도농원에서 눈물로 다 발산할 수나 있었지만 수아는 생으로 참았다는 의미였다. 말로 드러낼 것은 모두 그 깊은 우물 같은 눈 속에다 가라앉혀 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더 미안했다.
‘고마워요, 수아.’
나는 다만 그 말은 하고 싶었다. 다 품어 줘서 고맙고 무엇보다도 부모님 곁에 있어줘서 고마웠다.
어머니가 가장 허전해 하실 것 같았다. 눈만 뜨면 함께 이야기 하고 함께 차 마시고 함께 장보러 가고 함께 꽃 가꾸고 함께 음식을 만든 그 많은 시간들, 처음 페루에서 왔던 다음 날부터 양 갈래로 머리를 땋아주시던 분, 브라이언과 함께 해야 하는 것이 입양의 이유였지만 자라면서 막상 둘이 가까이 할 때는 경계하시던 어머니였다, ‘애나야, 브라이언은 네 동생이란다,’ 라며. 그것은 곧 어머니가 내 어머니이기를 포기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페루의 부모님과 오빠를 잊어서는 안 된다. 나도 자식 잃은 고통을 경험했으면서 자식을 멀리 떠나보내야 하신 아버지의 심정은 모른 척 한 것이 늘 마음에 걸렸어. 그러나 기억 때문에 네가 마음 아픈 것은 싫구나. 너는 내 딸로 살 거야. 밝고 화사하게 네가 누릴 수 있는 것 다 누리며 그렇게.’
일곱 살에 떠나온 페루에서의 모든 기억은 어머니가 의도하신 삶에 편입되면서 희미해졌지만 삼뽀냐를 불면서 남은 자락을 그리움으로 간직할 수 있었다. 어렸던 기억, 그 기억을 품고 있되 그것으로 내가 아픈 것은 어머니가 원치 않으셨다.
내 앞에서 늘 먼저 정갈하고 고상한 언어를 쓰셨고 부족함 없는 원만한 세계를 보여주려 애 쓰셨던 분, 이 분이 내 어머니, 조앤 힐스 여사이시다.
어머니가 날 새 집으로 보내며 말하셨다, ‘이제부턴 엄마 아버지보다 마이클을 더 많이 생각해야 한다.’ 고.
추리 하우스를 품은 오크나무가 있는 집, 일곱 살에 가족이 되어 내 몸과 마음이 자란 집을 떠나 마이클을 따라 자동차로 40여분 걸리는 파크웨이에 위치한 신혼집으로 가면서 나는 어느 때보다 깊이 어머니의 말을 새기고 있었다, 마이클을 많이 생각하라고 하신 말이었다.
이젠 마이클이 있는 곳이 내 집이다. 이제야 내 몸과 마음이 마음껏 뿌리를 내릴 곳에 온 것 같았다. 나는 마이클에게, 마이클은 내게 소속된 것 같은 깊은 유대감을 살아가면서 확인하게 될 마이클과 나의 공간이었다.
부부, 한 사람이 성장하고 성숙한 긴 세월을 딛고 새롭게 이어진 관계, 아직 무르익을 시간이 부족했지만 그러함에도 무엇이든 가능한 관계에의 당당함이, 책임이, 의무가 있었으므로 그것은 사랑이란 이름의 다른 빛깔일 것이다. 오직 내게만 허용된, 사랑할 권리였다.
자동차 속에서 사랑을 키울 수밖에 없었던 깊은 겨울의 그때, 우리가 기다린 여름은 결혼과 함께 시작되었고 우리는 여름 놀이를 즐기기 시작했다.
나이아가라 강을 끼고 파크웨이를 따라 자전거를 탔고 롤러 블레이드를 탔다. 강을 따라 함께 걸었고 그 강에다 우리는 보트를 띄웠다.
일찍이 윈스턴 처칠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요일 오후의 드라이브 길’ 이란 시적인 이름을 붙인 파크웨이는 결혼 전부터 지금까지 마이클과 나의 데이트 코스였다. 그리고 우리는 보트를 탔다.
결코 나약하지 않다는 걸 과시하기 위해 시작한 스피드보트 타기가 이미 마이클이 즐기는 여름 놀이이듯 익숙하지 않던 나도 뒤집어질 것 같던 아찔한 속도감에 몇 번 공포를 경험한 뒤에야 환호를 지르게 되었다.
나는 더 이상 손에 삼뽀냐를 들고 있지 않았다. 처절하면서도 그리움이 서걱대는 잃어버린 제국, 잉카를 그리는 음악 속에다 내 마음을 빠뜨리고 싶지 않았다. 환호가 터져 나올 것 같은 스피드, 긴장감이 땀으로 발산되면서 전신을 적시게 하던 자전거 타기가, 롤러 블레이드가, 스피드보트가 훨씬 흥미로웠다.
일손은 재바르면서도 지극히 정적이고 느림에 익숙한 나는 점점 스피드에 익숙해 가고 있었고 그것은 내가 몰랐던 내 속의 어떤 성향이었다. 그으면 금방 불꽃으로 피어날 기질이 내 속에 있었던 것이다. 오래 갇혀 없는 듯 존재하던 내가 지닌 다른 성향, 곧 열정이었다. 마이클은 내 속의 열정을 하나씩 불러 일으켜 자신의 방식으로 길들였다. 주저하는 날 이끌어 함께 되풀이 하여 마침내 스피드를 누리게 하고 넘어지지 않도록 롤러 블레이드를 즐기게 만들었다.
‘할 수 있어, 애나! 나도 하잖아!’
내가 주저하는 일은 ‘나도 하잖아!’ 라며 마이클이 날 끌었다. 마이클이 주저하며 겁을 내는 날 이끌어 결국 하게 만들 때 나는 그의 속에서도 내가 몰랐던 어떤 성향을 발견했다. 적극적이면서 끈기 있는 추진력, 마이클은 그렇게 술에서도 해방될 수 있었을 것이고 우연히도 만나기를 꺼려한 날 사랑에 빠지게 하고 마침내 나를 아내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함께 해야 즐겁고 행복하다는 걸 이제야 알았어, 애나.”
나이아가라 강을 따라 이어진 파크웨이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마이클과 나는 자전거를 잔디에 뉘여 둔 채 피크닉 테이블에 앉았다. 그 동안 마이클은 스피드보트를, 롤러 블레이드를 혼자 탔다고 했다. 자전거를 혼자 탔고 혼자 뛰었다고 했다.
“늘 혼자였다고?”
마이클 곁에 친구가 없었다는 의미였다. 브라이언과는 비즈니스 동료들 모임에서는 서로 만났지만 놀 때는 혼자였다니 내 마음이 아팠다.
“내가 원한 일이야.”
“원했어? 왜?”
우리는 아주 느리게 흐르는 나이아가라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대로 치료를 시작하려면 격리되어야 했는데 나는 나 스스로를 격리하기로 했거든.”
그러니까 알콜중독 치료를 위한 격리였다. 술을 눈앞에 둘 가능성이 있는 모임, 그 사람들과는 치료의 목적으로 거리를 두었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집안에 있던 와인 병도 다 치우려고 하셨는데 그러자면 우리 와이너리부터 팔아야 했어. 내가 그러지 마시라고 했어. 어차피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거든.”
아버지가 경영하시던 와이너리와 집에 와인이 지천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와인이었고, 와인 동네에 살고 있었다.
“눈앞에다 두고도 손이 가지 않을 수 있도록 나는 날 이기고 싶었어. 열심히 일하고 싶었어. 그래서 혼자 뛰거나 혼자 보트타고 어느 날은 혼자 롤러 블레이드를 타고 다음 날은 자전거를 타면서 철저하게 나를 격리시켰어,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술로부터.”
“얼마나 힘들었을까, 혼자서!”
“힘들었어, 포기하고 싶었을 정도로. 친구들은 다들 왕성하게 일하고 결혼하고 자식도 두고 그 나이에 맞는 삶을 사는데 내 인생은 한참 뒤쳐져 있다는 자괴감에 빠질 땐, 다시 술병 하나에 날 내팽개치고 싶기도 했어.”
담배도 그 때 끊었다고, 마이클이 말했다.
“그런데 이것 못 해내면 내 인생은 없다, 는 서늘한 생각이 따라다녔어. 아직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했는데 내 인생이 없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아? 그 때는 정말 무서웠어.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었어. ‘괜찮아, 마이클, 넌 해 낼 수 있어.’ 그 말을 듣고 싶었나봐”
“오, 마이클!”
내 마음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어렸을 적의 기억으로 내가 반감을 품고 있었을 때 마이클은 누군가를 향해 간절하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마치 내게 내민 그의 손길을 매몰차게 뿌리치기라도 한 듯이 미안했다.
“넌 해 낼 수 있어, 마이클, 하고 부모님이 울면서 애원하고 격려하셨을 땐 내가 외면하다가 철저하게 혼자가 되자 그 말을 그리워하게 된 거지.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지금이야말로 내 의지가 필요한 때라고. 철저하게 혼자일 때가 바로 내가 할 때라고.
그래서 생각을 바꿨어, 어차피 해 낼 수밖에 없을 바엔 즐기자고. 스피드보트에서 물살을 가르며 나는 나약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고, 롤러 블레이드를 타면서 다시는 넘어지지 않을 거란 각오를 했어. 자전거를 타거나 혼자 뛰면서 다 나아서 열심히 일할 생각을 했고, 혼자 걸을 땐 함께 걷고 싶은 좋은 사람을 만날 거라는 상상을 했지. 그리고 술 마셨을 때는 한 번도 한 적 없던 가족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어, 내 삐뚠 언행 때문에 나도 괴로웠는데 부모님은 얼마나 더 힘드셨을까, 하고. 그렇게 생각하려니 나 때문에 괴로웠을 사람들이 계속 떠오르는데 그 중에 브라이언도 있고 애나가 있었어.”
“나도?”
그것은 전혀 예상치 않은 마이클의 고백이었다.
“응, 애나를 떠올리는 일은 그것 자체가 고통이었어. 그 어렸던 나이에 말도 통하지 않던 낯선 곳에서 힘들었을 아이에게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하는 후회를 하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는데 그 때는 이미 늦었더라. 혼자서 자전거 타거나 걷거나 뛰면서 혹 애나를 만나게 될까, 하고 사람들을 눈여겨 본 적도 있었어.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겠는데 어떻게 같은 동네서 한 번도 부딪지 않았을까 몰라.”
우연으로라도 부딪게 될까 나는 두려워했을 때 마이클은 우연으로라도 만나게 되기를 기대했다는 말이었다.
“평소 부인들 모임에 다녀오면 어머니가 그러셨어, 오늘은 힐스 댁의 애나가 어머니를 모시고 왔더라고. 나도 언제 운전핑계로 부인들 모임에 갈까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 그런데 길모어 부인이 한 말을 어머니로부터 들었을 때 드디어 사과할 기회가 왔구나, 하고 속으로는 기뻤는데 막상 전화를 하려니 쉽지 않았어, 네가 내 전화를 거절할까봐.”
자주 생각을 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마음속에다 마이클에 대한 반감을 여전히 품고 있었을 때 마이클은 그렇게 스스로 자신이 한 행위, 심지어는 어렸을 때, 철없었을 때 한 행동까지도 돌아보며 후회를 하며 내게 사과를 할 기회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이, 가장 진지하게 나 자신과 남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했던 시간이었어. 그러면서 점점 술을 멀리하게 되었어. 눈앞에다 와인을 두고도 손을 대지 않자 지켜보시던 아버지가 와이너리 일을 해 보라고 하시더라.”
“아버지께서 당신을 믿으셨네?”
“응, 나한테 술을 맡기셨으니까. 자식 인생과 아버지의 비즈니스를 건 모험을 하신 거야. 좀 다르게 제대로 해 보고 싶었어. 그래서 시장조사도 하고 와인과 음식의 상관관계와 사람들의 선호도를 조사하고 동네의 특성도 감안해야 했어.”
내가 마이클의 뺨에다 키스를 했다. 마이클이 장해서였다. 기분 좋은 표정을 하며 날 바라보던 마이클도 내게 키스를 했다.
“혼자서 한 번은 해 냈는데 두 번은 못하겠어. 애나와 함께 하면서 같이 즐기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걸 알게 됐거든.”
“다시는 혼자 안 둘 거야, 마이클.”
나는 정말 그럴 참이다, 그를 혼자두지 않을 참이었다. 그러려고 우리는 부부가 되었으니까.
“애나, 당신과 해 보고 싶은 것, 우리 아이들이 태어나면 함께 해 보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아. 하나씩 다 해 볼 거야.”
마이클과 나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갈 줄 누가 알았을까? 나쁜 기억만 쌓은 채 다시는 만날 일 없을 것 같던 마이클과 내가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더 기대하는 것이 있다, 바로 우리의 아이들이다. 마이클이 계획한 것을 함께 할 우리 아이들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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