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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엘 콘도르( El Co'ndor)' - (29)
김외숙 소설가
- 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editorial@koreatimes.net)
- Oct 07 2021 09:24 AM
17. 부부
물비늘로 반짝이는 집 앞 나이아가라 강은 내려앉은 별 총총한 밤하늘 같았다. 어머니집 앞의 온타리오 호수로 흘러갈 물이었다. 이리호수가 집에서 20여분 채 떨어지지 않았고 내 집에서 온타리오 호수변의 어머니의 집까지는 40여분 떨어진 거리다.
이리 호수의 물이 미국과 연결된 피스 브리지를 지나면서 나이아가라 강으로 이름이 바뀌어 강폭에 따라 급하게 또는 완만하게 흐르다가 집 앞에 이르러서는 졸리듯이 머물러 있듯이 흐른다. 그러다가 낭떠러지를 만나면서 폭포가 된다. 바닥 치며 떨어져 거품 물고 쓰러졌다가 다시 소용돌이와 협곡을 만나고 마침내 바다 같은 호수, 온타리오에 당도하는 물의 흐름은, 때로는 폭포와 급류처럼 거친, 때로는 졸리도록 고요한 인생과 흡사하다.
마이클이 출근하면 가끔 나는 자전거로 집을 나선다. 나이아가라 폭포까지 또는 이리 호수까지의 외출이다.
폭포에는 밤낮 거대한 물줄기가 수직으로 떨어져 내린다. 평화롭게 흐르다가 느닷없이 만난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기함하고 있는 것 같은 물은 흡사, 뿌리는 페루의 그 땅에다 묻어둔 채 낯선 땅에 와 다른 말과 다른 사고의 충돌, 다른 관습과 문화에 치여 반은 넋이 나간 채이던 어렸던 내 모습이다.
죽은 듯 웅크리고 있던 물줄기는 시간이 흐르면서 거품을 털며 주섬주섬 기동하기 시작하고 아주 느리게 움직이던 물이 점점 좁아지는 강폭 앞에서 다시 서로 결속하며 흐름을 재촉한다. 그러다가 곧 협곡을 만나면 갈기 휘날리며 달리는 말처럼 흘러 마침내 바다 같은 호수, 온타리오에 당도한다.
비록 실개천에서 흐름을 시작했어도 온타리오에 당도한 물은 이제 수많은 종류의 물고기를 품은 호수다. 모든 지류를 품고도 늘 유유한 온타리오 호수는 강물이 바다로 가 안착하기 전에 곤한 몸을 풀어놓고 쉼을 얻는, 강물의 어머니다.
어머니에게서 온타리오를 느낄 때가 있었다. 온갖 지류의 강과 수많은 종류의 물고기를 품은 온타리오처럼 어머니의 품이 늘 넉넉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에게 아내이자 가장 친한 친구로, 외아들 브라이언의 유괴의 고통까지 속에다 삭인, 무엇보다도 입양한 나를 브라이언과 똑 같은 자식으로 키운 분이었다. 살면서 걸림돌을 만날 때, 그래서 일어서기 버거울 때 식구들은 먼저 어머니를 찾았다. 내게 어머니는 바로 온타리오였고 온타리오는 어머니였다.
온타리오 호수는 내게 페루의 하늘 호수, 티티카카이기도 하다. 안데스 설산의 녹은 물이 흘러 이룬 호수엔 갈대숲이 무성하고 무성한 갈대 사이로 새떼들이 비상했다. 페루 사람들은 잉카 문명이 티티카카호수에서 시작되었다고 믿는다.
일곱 살에 티티카카에서 흘러 당도한 온타리오, 다른 언어, 다른 사고, 다른 문화, 그 낯섦은 호수가 품고 있는 물고기 종류만큼이나 많았지만 이제 이 땅의 사람이 된 내게 온타리오는 티티카카보다 익숙하고 친근하다. 돌이켜 보니 온타리오 호수 변에서의 평화를 누리기까지 수많은 낯섦이 매일 발에 채였어도 어머니와 아버지, 브라이언과 가족이 되어 살면서 하나씩 익숙해 질 수 있었고 그것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브라이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세월 흘러 마이클과 독립된 가정이란 세계를 만들었고 그 세월도 또 몇 해나 흘렀다.
마이클로 인해 새로운 가족이 된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는 친정어머니와 아버지처럼 따뜻하고 인자한 분들이다. 어머니의 모임에 가끔 동행하며 낯을 익힌 시어머니, 에반스 부인은 딸이 없는 집안에 든 나를 딸처럼 다정하게 대하셨다.
‘애나야, 마이클이 널 만난 후 새 사람이 되었단다.’
시부모님은 마이클이 술을 절제하고 와이너리와 레스토랑 운영에 열정을 쏟는 것은 곁에다 나를 두었기 때문이라 믿으셨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마이클은 날 만나기 전에 이미 새 사람이 되어 있었다. 치료의 그 지난했을 과정을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를 고립시켜 마침내 이겨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나약함을 냉정하게 파악한 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과 싸운 것이다. 마이클의 의지가 해 낸 일이었다.
그러나 시부모님이 그렇게 말하실 때마다 나는 에반스 패밀리의 일원으로서 깊은 유대감을 느꼈다. 시부모님의 말씀은 나를 믿는다는 믿음의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마이클과 나 사이에 자식을 둔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은데 무슨 이유인지 임신 소식이 없었다.
시부모님의 말없는 기다림이 아니어도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초조했다. 벌써 브라이언과 수아의 아들 이안은 학교에 들어가도록 시간이 흘렀음에도, 수아가 둘째 아이, 딸을 얻었음에도 나는 임신의 조짐이 없었다. 어서 아기를 낳아 두 집안의 어른들과 마이클에게 안기고 싶고, 무엇보다도 ‘마이클이 널 만난 후 새 사람이 되었단다,’ 라시던 시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손자가 날 완성시키는 것 같아. 이 기분, 괜찮아.’ 라고 하신 어머니를 흡족하게 해 드리고 싶은데 임신의 소식은 없고 같은 비즈니스를 하는 회원들의 모임에 다녀오면 언젠가부터 마이클은 말 수를 줄였다. 한 번도 아이 때문이라고 말한 적은 없지만 나는 마이클의 심정을 그렇게 해석했다.
와이너리와 농장 경영에 마이클과 브라이언은 꽤 의욕적으로 선의의 경쟁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부모 세대가 일군 농장과 와이너리를 현대화된 시설로 바꾸고 해외시장을 개척하며 적극적으로 비즈니스를 확장하고 있었다.
유명한 와인 생산지를 찾는 관광객들의 선호도를 조사한 후 시작한 마이클의 와이너리와 레스토랑 운영은 순조로웠다. 적어도 그 세계에서 만큼은 마이클이 자신감에 차있고 그의 거침없는 경영방식과 트렌드를 이끄는 소비자의 수요는 서로 맞아 떨어졌다.
마이클의 공격적인 비즈니스 마인드인 ‘다르게’는 브라이언을 의식한 차별의 의미도 있을 것이다. 마이클에게 브라이언은 처남 매부지간 훨씬 이전부터 경쟁과 언쟁, 시기를 유발한, 그러나 한 번도 너끈히 제압의 통쾌함은커녕 사사건건 거슬리게 한 장본인이었다. 특히 날 보호하려던 브라이언에 대한 경쟁과 시기는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가슴 밑바닥에 앙금으로 남아 있을 것이었다. 마이클이 비즈니스의 성공과 강한 보호자로서의 이미지로 고질적인 앙금을 극복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나는 모르지 않았다.
그런 마이클을 위축하게 한 것이 있었다. 바로 자식이었다.
친구들 모임에서 커가는 자녀들 얘기를 할 때 대화에 동참할 수 없는 마이클이 위축된 심정으로 소외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나만큼이나 자식을 기다린 사람이었다. 자식이 태어나면 함께 하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은 사람이었다. 공통의 대화에 동참할 수 없는 마이클은 그래서 대신 와인 잔을 들기 시작했을 게다.
초조함은 내 속에서도 일었다. 수아가 둘 째 아이 레이첼을 얻자 나도 모르게 비교를 하면서 마이클이 브라이언과 경쟁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심정이 되는 것이었다. 비교할수록 이미 저만치 앞서 가고 있는 그들과는 다시는 나란히 걸을 수 없을 것 같은 초라한 심정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이클을 이해했다.
초조한 심정을 이기지 못한 나도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다.
“브라이언이 당신 안부 묻더라. 애나 행복하지? 하고 말이야.”
오늘도 마이클은 모임에서 와인을 마셨던 것 같았다. 한잔이 두 잔이 되고 그렇게 다시 술이 늘까 나는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와인은 안 돼, 마이클.’ 하고 말할 수 없었다. 절제를 해야 한다는 사실은 마이클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근데 애나, 그 말이 왜 기분을 묘하게 할까? 브라이언이 왜 당신 행복을 묻느냔 말이야.”
약간 취기가 있는 마이클의 말속에서 나는 가시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얼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당신, 나랑 행복하지 않아?”
빤히 눈을 들여다보며 다그치는 마이클의 말이 나를 코너로 밀어붙이는 것 같았다.
“누나 안부가 궁금했던 거겠지.”
나는 의도적으로 누나란 단어를 썼다. 그런데 브라이언은 왜 내 행복을 물었을까? 내가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모임에서 와인 잔을 들기 시작한 마이클 때문에 나를 걱정하기 시작한 것일까? 오래 전, 부모님 앞에서 마이클을 반대하며 브라이언이 말했었다, 알콜중독, 고치기 쉽지 않다고.
“근데 왜 내겐 거슬리지? 브라이언에게 내가 수아의 안부는 물을 수 있어도 행복을 물을 수는 없는 거 아니야?”
마이클 역시 그 말에 집착했다. 받아 넘길 수 있는 말에 집착하는 이유는 술기운 때문일 것이었다. 가슴 깊숙이 가라앉아 있었을 오래된 앙금이 마이클의 목소리에서 부유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몰아붙이듯 하는 마이클의 표정이 눈길만 부딪쳐도 오금이 저리던 어렸을 때의 기억을 불렀다. 그 자리에 앉아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던, 결코 돌이켜보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서로를 향한 그토록 간절하던 마음은 어디로 가고 마이클은 나를 의심하고 나는 되돌아보기도 싫은 어렸을 적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간절하던 심정을 무디게 한 둘 사이에 흐른 시간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 품에 없는 자식 때문인 것일까? 어느 이유였든 맘 아프기는 마찬가지였다.
더 대꾸를 하지 않은 채 나는 마이클을 벗어나 잔에다 와인을 채웠다. 나도 주량을 늘이고 있던 참이었다.
“당신, 술 마셔?”
식구들과 식사 시간에 가끔 한 잔씩 즐기던 일조차 결혼 이후부터는 금한 줄 모르는 마이클은 내가 와인을 싫어하는 줄 알았다.
“응.”
당신이 마시면 나도 마신다, 라는 사뭇 공격적인 대꾸였다. 주량을 늘려가고 있는 마이클을 향한, 말을 대신한 나 나름의 제동의 방법이기도 했다. 그리고 벌컥 벌컥 와인을 들이켰다.
“애나!”
마이클이 눈을 부릅떴다.
“지천인 게 와인이잖아.”
브라이언이 어떤 심정으로 했든 그 말이 마이클과 나 사이에서 이런 불신의 기류로 작용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이미 둘 다 동생과 누나란 위치에서 각자의 울타리 속 모든 것에 전부를 걸어 외눈조차도 주는 마음의 허점을 허용치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술기운이기로 이렇게 애꿎은 소리로 어깃장을 부리다니 몹시 서운했다. 다시 잔을 채우며 내가 말했다.
“마이클, 난 당신 밖에 몰라. 브라이언? 그래, 사랑하는 내 동생이야.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야? 당신이 느낀 그 감정, 그걸 왜 내게 따져? 당신과 브라이언 사이의 일이면 둘이서 해결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고는 벌컥벌컥 다시 들이켰다. 마이클이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이 모습, 쏘듯이 두 눈을 들여다보며 대드는 나의 저돌적인 모습에 마이클이 벙어리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나의 반응이었을 게다.
“애나!”
이윽고 마이클이 내 이름을 부르더니 다시 입으로 가져가려던 와인 잔을 내 손에서 빼앗았다. 잠시 마이클의 손 안에서 뻗대던 내 힘이 수그러졌다.
와인 잔을 빼앗긴 내가 마이클을 오래 바라보았다. 마이클을 바라보는 내 눈에 원망과 노여움, 그리고 ‘또 마시기 시작하면 당신, 또 힘들잖아.’ 란, 걱정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눈빛에 눈이 부시다는 듯 마이클이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우람한 팔로 내 허리를 안았다. 아주 찰나에 있던 일이었다.
“애나!”
그리고 우리는 소파에 쓰러졌다. 결코 이 분위기를 부를 시작은 아니었다.
그의 숨결은 이미 거칠었고 손길은 다급했다. 나는 아무런 거부를 하지 않았다. 여전히 서운함에도 죽은 듯 가라앉았던 욕구가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이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나는 방치한 채였다.
그런데 맘대로 의심하다가 맘대로 타오르기 시작하는 마이클의 행위가 불현듯, 날 놀린 그 수많은 어렸던 날들의 기억을 다시 부르는 것이었다. 온갖 짓궂은 말로 날 건드리고 놀리며 좋아라고 맘대로 희롱하던 그 때였다.
그 때 나는 왜 얼굴을 감싸고 주저앉은 채 말 한 마디 못했던 것일까, 내게 익숙한 언어, 케추아어를 두고도? 왜, 알아듣지도 못한 마이클의 언어에 주눅 들고 기죽어 얼마든지 방어할 수 있던 일에 지레 주저앉아버렸던 것일까?
나도 내 언어로 마이클의 경박했던 언어와 행동을 누를 수 있었어야 했다, 다시는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그런데, 그 때 하지 못한 후회가 내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없는 듯 숨어있던 내 전의를 자극하는 것이었다.
비록 그 때는 ‘우리가 다 어렸었잖아.’ 라며 덮어버린 일이긴 하지만 네가 그러면 나도 한 번쯤은 보여줄 수밖에 없다는 성질이 발끈 고개를 치켜드는 것이었다. 다시는 자신의 방법으로 날 희롱하지 못하도록, 다시는 자신의 기분에 따라 관계를 훼손할 의심과 스스로와 날 긁는 일은 하지 않도록 할 경고 같은 것이었다.
나는 거침없는 그의 손길에 제동을 걸고 더운 입술을 밀어냈다. 그 때, 한 번도 쓰지 못한 케추아어의 의미였다.
전에는 없던 내 거부의 제스처에 마이클이 미간을 찌푸리며 날 바라보았다.
나는 발딱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잔을 채워 벌컥벌컥 들이켰다.
“뭐 하는 거야, 애나!”
“마이클, 당신은 아직도 날 그 때의 애나로 대하고 있어, 이제는 의심까지 하면서. 놀리고 무시하고 조롱했잖아? 또 그러고 싶어? 자!”
이미 마이클 손에서 반은 풀어헤쳐진 블라우스를 벗어버렸다. 그리고 가슴을 조이고 있던 브래지어까지 풀어 던져버렸다. 숨어있던 내 두 유방이 스프링처럼 튕겨져 나와 마이클 눈앞에서 맹랑했다.
마이클이 주춤 물러나며 눈을 부릅떴다. 술기운이 싹 가신 표정이었다.
“더 마실래.”
나는 다시 탁자 위로 손을 뻗어 잔의 허리를 낚아채었다. 그리고 잔을 채웠다.
“애나!”
마이클이 다시 내 손아귀의 잔을 빼앗았다. 그리고 와락 내 어깨를 안았다.
“미안해, 이러지마. 잘못 했어 내가.”
그의 팔이 날 옥죄었다.
“나, 알아들어 애나. 당신 이렇게 하게 해 미안해.’
마이클이 날 안은 채 자꾸 말을 했다.
‘알아들었다고?’
내 성난 마음이 ‘잘못’ 이나 ‘미안’보다 그 말에 머물렀다.
알아듣다. 왜 이러는지 알다...
그 말을 믿고 싶은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날 옥죈 그의 힘 때문이 아니라 ‘알아들어’란 그 말 때문이었다. 알아들으라고 한 행동의 의미를 알아차렸다니 더 이상 내가 보탤 것이 없었다.
안겨서 생각해 보니 마이클과 나는 서로의 맘을 확인하기 위해 애꿎은 말로 어깃장도 부리다가 왜 그러는지 결국엔 서로 알아듣기도 하는 그런 관계였다.
바로, 부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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