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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엘 콘도르( El Co'ndor)' - (30)
김외숙 소설가
- 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editorial@koreatimes.net)
- Oct 08 2021 10:32 AM
18. 아, 어머니
브라이언과 수아가 두 아이들을 데리고 코리아로 가기로 결정한 것은 아이들의 여름 방학을 앞두고였다. 오래 친정엘 가지 못한 수아에게 부모님의 권유가 있었다.
‘수아야, 이번에 가면 부모님을 초대하려무나. 너희 사는 모습, 보고 싶으실 거야.’
부모님의 권유로 친정 부모님까지 초대하게 된 수아는 차마 아이처럼 환호를 지르지는 못하고 웃기만 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두 아이에게 코리아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를 만나면 이렇게 해야 한단다, 하며 가르치시고 이안은 인터넷에서 엄마의 나라 코리아에 대해 공부하며 출국 이전의 잔잔한 흥분을 북돋웠다.
몇 년 만이지만 찾아 갈 친정을 두고 있는 수아가 부러웠다. 자주 갈 수는 없었어도 어딘가 그곳에 서로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힘이었고 위로였으리라.
나는 또 페루의 아버지와 엄마, 마리오 오빠를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어떻게 나만 남겨두고 모두 떠나버렸는지 생각할수록 애달팠다. 다 잊고 새 가족과 새 집에서 마음 붙여 살라고 떠나버린 것 같았다. 만일 그렇다면 엄마와 아버지, 오빠는 돌아가 찾을 혈육이라고는 없는 내 속의 상실감은 미처 생각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코리아 첫 친정 길을 앞두고 쇼핑으로, 짐 꾸리기로 바쁜 수아를 바라보며 나는 그래서 더 쓸쓸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문제는 늘 내게 있었다. 페루의 식구와 산 세월보다 몇 갑절 더 많이 함께 산 부모님, 함께 산 집이 바로 친정인데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고도 페루의 부모님 자리에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두지 못하는 것이었다. 마음의 거리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닌, 늘 내가 만들었다.
나는 브라이언 식구가 코리아에 가 있을 동안 매일 부모님을 뵈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한 달간이지만 아이들과 자식내외가 없는 빈 집에서 부모님이 고요를 지키는 일은 못 견딜 일일 것이었다.
드디어 네 식구가 큰 짐들을 앞세우고 코리아로 떠난 후 나는 매일 낮에 집에 들러 어머니, 아버지와 점심을 함께 들거나 차를 마시고 내 집으로 돌아왔다.
“네 식구가 한꺼번에 가고 없으니 정말 빈집이네, 애나야. 한 달이 언제 지나가니.”
이제 떠났는데 어머니는 벌써 브라이언 네를 기다리셨다.
“조앤, 당신은 나랑 놀기 싫소? 우리도 어디 여행 다녀올까?”
아버지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며 어머니를 달래셨다.
“더운데 나가면 고생이죠, 탐. 우리는 그냥 집에서 시원하게 지냅시다.”
결국 어머니와 아버지는 여행을 가지 않으셨고 나는 마이클이 출근한 낮 시간에 부모님을 뵈었다. 그리고 가끔은 추리 하우스에 올라 삼뽀냐를 연주했다.
“디에고는 왜 한 번 안 다녀갈까요?”
집안일을 다 맡아 하던 디에고가 멕시코에서 더 이상 오지 않은지가 꽤 되었는데 갑자기 한가해지신 어머니는 오래 전에 떠난 디에고까지 기다리셨다.
“소설 한 권 쓰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책 만들면 들고 온댔으니까 기다려 봅시다, 조앤.”
“하기는 오죽하면 산고에 비유했을까. 포도농사가 차라리 쉬울 것 같네요.”
포도 한 송이가 영글기까지, 한 잔의 와인을 빚기까지 멕시코와 자메이카에서 온 인부들의 얼마나 많은 손길이 가야하는지를 아는 어머니는 소설 쓰기를 포도농사와 비교하며 아직 온다는 소식이 없는 디에고를 이해하려 하셨다. 과실농사 중에서 포도농사만큼 많은 손길이 가는 예민한 농사는 없을 거라고, 그래도 와인 한잔으로 지난한 과정을 보상 받는다고 식구들과 와인 잔을 들고 있을 때 가끔 말하신 어머니였다.
아버지도 이안을 데리고 포도농원을 바라보며 ‘이안 보아라, 저 농원, 네가 주인이란다.’ 라며 아이로 하여금 책임의식을 갖게 하던 나름의 의식을 할 수 없으니 언제 올지, 오기나 할 지 모르는 디에고를 기다리시는 것 같았다.
커가는 손자를 옆에 세우고 주인의식을 심어주던 의식을 당분간 손에서 놓아야 한 아버지가 어쩌면 더 쓸쓸하실 지도 몰랐다.
아버지는 이제 대부분의 일, 농장과 와이너리 운영을 브라이언에게 맡기셨고 요즘은 같은 업종의 친구들과 자식들이 경영하는 방식이 당신들의 방식과 어떻게 다르며 무엇으로 젊은이들이 맡아서 점점 확장하고 있는 비즈니스에 도움을 줄까 하고 아버지들다운 대화를 나누며 아주 느리고 한적한 하루 일과를 보내셨다.
‘일은 평생 물리도록 했다, 브라이언. 나도 네 엄마와 좀 놀고 싶구나.’
와이너리며 농원 일을 브라이언에게 맡기며 아버지가 하신 말이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한 달에 한 번씩 부인들의 모임에 동참하셨고 모임이 있는 날 어머니는 특히 옷차림과 머리 매무새에 신경을 쓰셨다. 이제는 사돈이 된 에반스 부인과 서로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외양부터 더 가꾸셨고 어머니는 여전히 고우셨다.
‘내일은 내가 모임에 가야해. 애나야 너도 쉬어라.’
어제 부모님을 방문했더니 어머니의 목소리가 바람에 팔랑대는 나뭇잎 같았다.
‘그럼 난 뭘 해?’
어머니가 약속이 있다는데 아버지가 짐짓 어리광을 부리셨다.
“나랑 모임에 갈래요, 탐?”
어머니의 말에 아버지는 역시 손사래부터 치셨다.
‘저랑 점심 하실래요, 아버지?’
내가 나서서 아버지를 바라보는데 ‘아니다, 애나야. 나도 실은 바쁜 사람이야.’ 라고 하셔서 어머니와 아버지, 나까지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부모님 집에 갈 일이 없는 나는 마이클이 출근한 후 모처럼 집에서 한가하게 낮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한 여름의 해는 머리 위에 오르기도 전에 달구어져 불볕이었다. 창밖 나이아가라 강엔 더위를 즐기는 사람들이 벌써 보트를 띄워 물살을 가르기 시작했다. 바람 한 점 없어 고요하던 나이아가라 강이 보트가 지나가자 몸을 뒤틀며 거품을 물었다. 아무리 한 여름의 불볕이라도 강물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다.
‘더운데 나가면 고생이죠. 우리는 집에서 지냅시다.’
여행갈까 하시던 아버지의 말에 어머니가 하신 말이 떠올랐다. 오늘 같은 더위엔 강이나 바다가 아니라면 어머니의 말처럼 집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갓지게 책을 읽다가 낮잠에 빠졌다. 얼마나 잤을까, 전화 소리에 깨었다.
“경찰입니다. 애나 에반스씨 인가요?”
상대방은 상당히 사무적이면서도 정중한 목소리의 남자였다.
낮잠에 취해 여태 몽롱하던 정신이 ‘경찰’이라는 말에 머릿속이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잘못한 일도 없으면서 ‘경찰’이란 말에는 왜 그토록 머릿속이 서늘하도록 놀랐을까?
어렸을 때, 새 부모님을 따라 오기 전에 마리오 오빠가 어느 날 들이닥친 경찰에 잡혀 내 눈 앞에서 수갑이 채워진 채 떠난 그 일이 찰나에 지나갔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 마리오 오빠도 없는 지금 경찰이 무슨 일일까? 아주 찰나에 나는 다시 마이클을 생각하고 있었다, 혹 그가 술을 마시고 일을 만든 것일까, 하고.
지금은 술을 가까이 할 시간도 아님에도 불안한 내 머리 속에 그 일 아니고는 다른 가능성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눈앞이 캄캄했다. 그 끔찍했던 치료의 시간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고 한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시죠?”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조앤 힐스씨의 따님인가요?”
“어머니가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제 어머니에게?”
그 때서야 나는 어제 방문했을 때 오늘 친구들 모임이 있다고 하신 말과 운전 사고를 먼저 떠올렸다. 어제 어머니는 분명 ‘ 애나야, 우리가 이번에는 좀 멀리 가서 점심을 하기로 했단다, 폭포 쪽에서.’라고 하셨다.
폭포 근방의 레스토랑은 내 집과는 그리 먼 곳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따님을 찾으시는군요.”
어머니가 경찰을 통해 나를 찾는 이유, 그것은 분명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의미했고 나는 경찰과 어머니가 계시는 그 곳으로 바로 차를 몰았다.
어머니의 자동차는 나이아가라 폭포 근처 길 한쪽에 주차되어 있었고 어머니는 자동차 안에서, 그리고 전화를 했을 경찰은 바깥에서 어머니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
“오, 애나, 애나야!”
어머니가 나를 보자마자 내 손을 잡고 우셨다.
“어머니, 괜찮아요, 괜찮아요.”
내가 우시는 어머니의 어깨를 안았다. 뭔가로 놀라셨을 어머니는 떨고 있었다.
“어머니가 다치셨나요?”
나는 돌아서서 경찰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기억에 혼돈이 온 것 같아요.”
기억의 혼돈,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운전 중이었을 어머니의 기억에 문제가 생겨 집에 가는 길을 잊으셨다고 했다. 그래서 한 곳에 오래 서 있던 중에 이를 이상히 여긴 경찰의 눈에 띈 것이었다.
집에 가는 길을 잃으셨다니 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집으로 갔다. 집에 가는 삼십여 분 동안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시지 않았다. 어머니가 마음의 안정을 취하시도록 나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집에 당도해 자리에 누우시게 하고 더운 날임에도 따뜻한 차를 준비했다.
“내가 길을 잃었단다, 애나야.”
어머니가 말하셨다. 두 눈에 공포가 스며있었다.
“익숙한 길이잖아요, 어머니?”
어머니 곁에 의자를 당겨 앉으며 내가 말했다.
“익숙하다마다. 결코 잃을 수 없는 길이지. 그런데 레스토랑에서 폭포까지는 갔는데 거기서 길이 사라졌어.”
그래서 어디로 가야할 지 몰라 서 있었다고 어머니가 말했다.
“내가 어떻게 된 걸까, 애나야? 내 평생 지나다닌 그 폭포 앞에서 어떻게 집에 오는 길을 모를 수가 있니?”
어머니가 한 손으로 내 손을 힘주어 잡았다. 어머니는 손을 떨었다.
“지금이라면 폭포 앞에서 어떻게 집으로 올지 머릿속으로 훤히 그릴 수도 있는데 내가 왜 그랬을까?”
정말 그 때 어머니는 왜 그러셨을까? 어떻게 집에 오는 길이 기억에서 사라질 수 있을까, 평생 다니신 그 길 위에서? 아무리 그러셨어도 어머니가 노인성 기억상실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어르신들이 주로 앓는 그 병, 너무 무서웠다.
‘코리아로 간 브라이언 때문일까?’
가까스로, 몇 년 전에 브라이언이 코리아에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며 불안해하신 적이 있음을 상기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머니의 의식 속에는 어렸던 브라이언을 잃어버린 기억이 잠재해 있었다. 공교롭게도 지금은 브라이언이 수아와 두 아이들을 데리고 떠났다. 어머니의 의식 속 상실의 상처가 브라이언 식구가 떠난 지금 길을 잃어버리는 것으로 나타났을까?
“브라이언 식구가 보고 싶으세요, 어머니?”
어머니의 심정을 알면서 넌지시 여쭈었다.
“브라이언이 내 눈앞에 없으면 불안해.”
그러니까 브라이언의 부재는 여전히 어머니를 불안하게 하는 기제로 작용되고 있다는 의미였다. 어머니 속에 오래 쌓여있던 불안이 브라이언 식구들이 코리아로 떠난 후 가장 익숙한, 집에 오는 길을 잃어버리는 것으로 나타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머니에게 집과 브라이언은 가장 소중한 존재였다.
“브라이언은 늘 집에 왔어요. 부모님이 계시니까요.”
“그럼, 왔고말고. 다섯 살 어린 나이에도 그 밤길에 엄마를 부르며 왔단다.”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두덩의 무게도 감당할 수 없다는 듯 스르르 눈을 감으셨다. 운전 중에 사라져버린 길 때문에 얼마나 당황해하셨을지, 얼마나 무서웠을지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낯선 증세가 무서워 나는 곤히 잠드신 어머니 가슴에 엎드려 울었다.
‘내 어머니, 조앤 힐스여사.’
아버지와 결혼해 작은 포도농장에서 지금의 대 농장으로, 와이너리로 사업을 확장하도록 아버지 곁에서 조력하신 분이었다. 인부들이 시기에 따라 해야 할 일을 아셨고 날씨가 포도농사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아셨고 수확의 때도 아셨다. 심지어는 예민하고 까다로운 포도농사와 소설 쓰기를 비교할 줄도 아시는 분이었다.
해마다 먼 나라에서 오는 인부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아셨고 부인들의 모임에서는 단순히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의미 이상이 되는 그 교류가 아버지의 와인 비즈니스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아시는 지혜로운 분. 결코 단순하지 않았을 큰 비즈니스 운영에 아버지가 지치고 흔들렸을 때마다 가장 가까이서 함께 걸으신 어머니였다.
어렸던 나를 딸로 입양해 일찍 엄마를 잃은 내게는 어머니로 사신 분이었다. 딸로 키운 나와 외아들 브라이언이 남매란 경계를 넘나들며 그 경계를 허물려고 했을 때는 야속하도록 관계를 분명히 하신 일로 가혹한 원망과 함께 다시 자식을 떠나보내야 한 아픔을 겪으면서도 가족의 질서를 지키게 한,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성품과 인품이 깃든 말씨를 들으면서,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 속에서 자랐기에 내 속에 좋은 성향이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어머니가 보여주고 들려주신 삶의 영향일 것이었다.
무슨 일에든 식구들이 길을 두고도 헷갈려 할 때마다 일러주고 함께 걸으신 어머니가 정작으로 당신이 가야 한 길은 잃고 당황해 우시던 모습, 기진해 잠이 든 모습에 내 마음이 몹시 아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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