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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유감이다
소설가 김외숙
- 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editorial@koreatimes.net)
- Nov 03 2021 10:34 AM
요즘 한국서 날아오는 몇몇 소식들이 연거푸 충격을 준다. 이름도 요상한 천화동인, 화천대유에 오징어 게임 같은 것이다.
이것의 공통분모는 천문학적 숫자의 돈이다. 하나는 상한 냄새가 풀풀 진동하는 비리, 다른 하나는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 곧 네가 죽어야 내가 그 돈을 가질 수 있다, 라는 비정한 스토리인데 다르다면 하나는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요, 다른 하나는 허구일 것이다. 아니 허구인지 실제의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허구라 믿고 싶고 그래야 한다. 작품 이면에 숨겨진 주제는 분명 따로 있겠지만 표면적으로는 게임에 진 모든 사람은 죽고 한 사람만 이겨 그 큰돈을 갖는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돈에 있어서 백만이란 숫자가 내가 체감할 수 있던 가장 큰 숫자였을 때가 있었다.
그 뒤 돈의 가치가 달라지면서 백 만이 천만 단위가 되었고 어느 해부터 억이 되더니 그 억이 수십, 수백, 수천억에서 조까지 확장되면서 마침내 돈의 단위는 나의 계산과 체감의 범주를 벗어나 버렸다. 사람이 머리를 쓰거나 몸을 움직여 벌 수 있는 일반적인 방법의 돈의 단위와는 너무나 먼 것이어서 분량에 대한 감이 도무지 잡히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그 수백 억, 수 천 억의 돈을 몇 백 만원 또는 몇 천 만원을 투자해 챙겼단다. 그들은 돈을 뻥튀기 기계에다 넣어 튀겨내는 재주를 갖고 있는 사람들일까?
그들 때문에 매스컴에서 몇 십 억이 어쩌고 하면 나도 이젠 ‘에이, 그 정도 갖고?’ 하는, 숫자에 대한 개념이 없어진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들이 적은 돈으로 천문학적인 숫자의 돈을 벌 때, 오징어 게임의 사람들은 단 한 사람의 이기는 자가 되기 위해 여러 과정의 목숨을 건 게임을 해야 했고, 승리한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었다.
오징어 게임.
돈만 쥘 수 있다면 양잿물도 마실 절박한 사정에 처한 사람들로 하여금 이길 확률도 희박한 게임에 부나비처럼 목숨을 던지도록 한 내용의 이 드라마가 세상을 흔들고 있다. 어렸을 적에 너나없이 경험했을 유년의 놀이들을 거액의 돈과 목숨이 걸린 어른들의 서바이벌 게임으로 둔갑시킨 작가의 기발한 발상 때문일까, 아니면 그러함에도 작품이 품고 있는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 때문일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모르고 달고나를 모르고 줄다리기를, 구슬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대한민국 사람이 아닐 것이다.
서울에 갔을 때 내가 술래가 되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하며 함께 논 손녀가 지난여름에 쓴 그림일기를 본 적이 있다. 그 때 아이는 뽑은 헌 이빨에다 빨간 하트를 그려 넣은 그림과 함께, ‘이를 뽑았는데 무서웠지만 안 울려고 참았다.’ 는 내용의 글과 ‘아침에 일어나니 베개 밑에 돈 천원이 있었다, 이빨 뽑을 때 안 울었다고 엄마가 주신 돈이다. 나는 기분이 좋아서 팔짝팔짝 뛰었다.’ 라고 썼었다.
그 이야기를 내 친구에게 했더니 친구가 한 말이 ‘천 원? 허리 굽히기 귀찮아서 굴러다녀도 안 줍는대.’였다.
천 원 한 장 때문에 언성을 높인 적이 있고, 천 원 한 장이 이 천 원이 되고 만원이 되던 뿌듯함에 늘 빠듯하던 삶에서도 웃을 수 있던 시절을 두고 있다. 실은 지금도 큰 숫자의 계산에는 익숙하지 않은 나 같은 서민에게 천 원은 여전히 계산의 기준이다.
발아래에 굴러다녀도 줍는 수고는 마다하고 뻥튀기할 생각만 한다면, 다 죽고 나만 남아 큰돈을 갖겠다는 생각만 머릿속에다 채운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 결국 다 죽고 큰 돈더미에 올라앉을 한 사람만 존재할 텐데, 아무도 없는 세상에서 홀로 돈더미에 앉아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걸까? 어쩐지 비리 덩어리일 것 같은 그 천문학적인 숫자의 돈, 그 간 큰 짓을 저지른 사람들이 주는 충격에 이 서민은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실은 나 같은 사람은 돈 튀겨내는 기술에도 돈 때문에 목숨 내놓을 게임에도 관심이 없다. 더구나 혈기 앞세워 움켜쥐려 하기보다 더러는 그렇게 살았을 삶을 돌아보며 후회도 하고 또 더러는 스스로 칭찬도 하며 평화를 찾을 나이이다. 그러니까 편한 심정으로 삶을 되돌아보며 추억 놀이를 할 나이인 것이다.
돌이켜 보니 어머니가 밥상에 올릴 찬거리 앞에 두고 동전 몇 푼으로 얼굴 붉히고 있었을 때, 우리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며 놀다가 설탕 녹여 달고나를 만들었었다. 달고나는 단 것이 귀하던 유년의 그때엔 단 것의 대명사였다.
얼마나 달콤한 기억인가?
설령 모두가 고단한 삶에 휘둘리고 있었어도 추억이란 이것저것 어우러져 결국 달콤한 달고나 맛과 향 같은 것이어서 돌아보는 사람들에게는 아련한 그리움이 아니겠는가?
삶이 버거울 때, 달려갈 아득한 앞을 보기 전에 걸어온 뒷길을 먼저 돌아보는 이유는 달콤한 기억이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 기억에서 위로를 받고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웃음이 사라진 입가에다 미소를 번지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추억은 여전히 달콤한가?
앞으로 무궁화 꽃을 떠올릴 때, 줄다리기와 구슬, 달고나의 시절을 되돌아볼 때, 오징어 게임도 덩달아 따라오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추억의 그 자리에 돈 차지하려는 핏발 선 눈빛과 긴장, 죽을 수도 있는 자들의 공포와 위기의식이 차지해버릴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이다. 한 번씩 돌아가 고단한 삶 풀어놓고 싱긋이 미소 지을 수 있던 쉼의 마지막 보루 같은 것, 그것을, 마구 덮치는 돈의 위력에 휘둘려 제대로 지킬 수 없을 것 같아 불안한 것이다.
왜 맘대로 남의 추억을 건드리는가?
돈과 목숨 놓고 하는 게임에 왜 유년의 추억까지 끌어들이는가?
나는, 그것이 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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