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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신춘문예 수필 가작 '석양'
박 엘리야
- 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editorial@koreatimes.net)
- Jan 04 2022 01:32 PM
한인문인협회 주최, 한국일보 후원
나뭇잎에 갈색이 번져 가는 어느 가을 날, 바닷가로 드라이브를 갔다. 차 문을 열자 물이 보이기도 전에 검푸른 냄새가 코에 닿았다. 물방울로 폐를 적시고 모래를 밟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저번에 왔을 때는 사람이 많았는데 오늘은 아무도 없다. 바다만이 홀로 남아 들숨 날숨을 쉬고 있다. 바다의 커다란 숨소리를 들으며 푸른 바다를 바라보았다. 하얗게 생기고 부서지는 파도를 따라 어떠한 흔적들이 줄지어 떠내려 온다. 물 속에 삼켜졌다가 내뱉어지며 자갈과 부딪쳐 탁탁 소리를 냈다. 나뭇가지, 해초 조각, 머리 끈, 병 뚜껑, 장갑 한 짝. 한 때 바다를 거쳐갔을 무언가의 작은 조각들이 내 발치에 닿았다. 그 것들을 바라보는 내 마음에도 누군가와 함께했던 순간들의 조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또 다시 떠올랐다. 사람에 대한 기억은 그런 작은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를 기억하기 보다는, 순간 순간의 장면들이 모여 내 안에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자이크를 만든다. 끝도 없이 걸으며 열띤 대화를 하던 네 개의 다리, 스스로에게 지친 나를 둘러싸던 팔, 저 멀리 어두운 거리를 바라보던 눈동자. 파도는 그칠 줄 모르는 리듬으로 그런 순간의 조각들을 실어 나른다.
바닷가를 따라 걸으며 조개 껍데기 몇 개를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모래 위에는 많은 조각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하지만 저 차가운 물 속에는 더 많은 조각들이 숨어 있을 것이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순간들과 잊은 줄도 모르는 잊혀진 순간들이 물살과 한데 뒤엉킨 채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법칙으로 바다는 잊어야 할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해서 내뱉었다. 나는 이미 많은 것을 삼켜버린 바다가 내게 남겨둔 몇 개의 조각들을 고이 모아둔다.
사람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런 조각들을 모아다가 내 안에 따스한 등불을 만드는 일이다. 꺼지지 않는 온기로 나를 지켜줄 등불을 만드는 일이다. 같은 공간에서도 다른 기억을 새기며 사는 우리는, 저만의 바다에서 홀로 떠돌아 다니는 방랑자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른 채 우리가 지나온 물길은 거친 파도에 삼켜진다. 한 때 분명했던 목적지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우리는 그저 늘 가던 방향으로 나아갈 뿐이다. 자신만의 등불에 의지한 채. 해는 수면 위에 기다란 빛 길을 만들었고 갈매기 한 마리가 소리 없이 날아갔다.
때로 어떤 순간의 조각들은 무겁고 날카롭다. 계속해서 나를 불러 세우고 바닥 없는 물 속으로 가라 앉게 한다. 흐려지지도, 무뎌지지도 않는 날카로움으로 나를 주시한다. 하지만 그런 조각들도 결국 다른 누구도 아닌 나만의 것이다. 나는 알고 있다, 그 날카로운 조각들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계속 해야 한다는 것을. 그럼에도 언젠가는 그 조각들도 내 등불이 되길 바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바람이 점점 차가워지고 해는 눈높이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잠시 후 해가 물에 닿아 물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한다. 해와 물이 만난 선이 노랗게 빛났다. 얼얼한 눈을 꾸욱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하며 해의 죽음을 지켜본다. 오늘이라는 것의 화려한 죽음. 그 죽음 앞에서 파도 소리는 태평하기만 했다.
빨갛고 노랗고 보라색의 빛이 하늘과 파도 위로 남겨졌다. 어두워 질수록 오히려 색깔이 점점 짙어졌다. 마지막 남은 힘을 불 태우듯이 하늘은 더욱더 찬란하게 빛났다. 수면 위의 조각들도 오색 빛으로 흔들렸다. 내가 저무는 날에도 내 안의 조각들은 오색 빛으로 빛날 것이였다.
하늘 빛이 점점 희미해졌고 별이 하나 둘 빛을 밝히기 시작했다. 밤이 되자 바다는 하늘보다 어두워졌다. 그 많은 조각들을 어둠 속에 삼킨 채. 별이 된 누군가의 영혼만이 하늘에서 반짝거렸다.
토론토대 제약과학 박사과정 중. 약사. 2011년 이민.
수상소감
상을 받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저에게 새로운 문이 열린 것 같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많이 배우고 성장해서 좋은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심사평(심사위원 김영수)
박 엘리야님의 '석양'은 바닷가에 서서 바라본 자연의 석양과 인생의 석양을 이야기한다. 파도와 물결에 실려온 조각들에 의미를 부여하여 바다의 언어와 인간의 삶을 형상화한 글이다. 작은 조각 하나조차도 허투루 보지 않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삶에서 한때 누군가와 함께했던 추억이고 흔적이라는 걸 알아서다. 삶의 편린 중에는 ‘무겁고 날카로운’ 것들도 있게 마련이지만 그 또한 자신의 몫이라는 걸 용인할 줄 안다.
그는 석양에 추억을 돌이켜보는 것에 머물지 않고 사유의 폭을 넓혀, 물 속 깊숙이 잠겨서 보이지 않는 것들에까지 가 닿는다. 그것이 ‘사람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런 보이지 않는 조각들을 모아 내면에 따스한 등불을 만드는 일, …저무는 날에도 내 안의 조각들은 오색 빛으로 빛나리라’는 긍정적 자기 암시로 귀결된다. 설명을 자제하여 사유의 여지를 두면서도 길지 않은 글에 이 정도의 깊이를 넣을 수 있다니 놀랍다. 다만 관념적인 표현이 많다 보면 전달력이 약해질 수 있으므로 많은 독자에게 쉽게 다가가 그들의 생각과 마음을 흔들 수 있는 구체어의 비율을 고려하면 좋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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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editorial@koreatimes.net)
전체 댓글
물푸레나무 ( stmh**@gmail.com )
Jan, 05, 07:12 PM'오늘이라는 것의 화려한 죽음'
이건 완전히 시네요.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