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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훗날에
소설가 김외숙
- 캐나다 한국일보 (editorial@koreatimes.net)
- Jan 18 2022 05:23 PM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지난 한 해 동안 이 세상 사람들은 같은 이유로 참 힘들었다. 11월에 출간한 장편소설 <엘 콘도르> 퇴고의 시간이 없었다면, 코로나와 백신 사이를 오가며 나도 꽤 우울하게 지냈을 것이다.
초고를 마치고 나면 나는 한동안 작품을 덮어두는데 손에서 작품이 떠나있을 동안 손과 눈을 쉬게 하는 것이다. 그때가 언제가 되든지 다시 보고 싶을 때까지 작품은 내 시선에서 놓여나게 되는 것이다.
늘 작품을 쥐고 있다가 다 놓고 나니 손이 심심해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일 하나를 시도했는데 바로 청국장 만드는 것이었다. 무료한 상태에 익숙하지 않은 내가 그 때 유튜브에서 청국장 만드는 장면을 보게 된 것이다.
결코 내가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란 생각을 했었는데 의외로 청국장 만드는 일은 쉬웠다. 콩을 삶아 알맞은 시간 동안 묻어두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온 집안 공기를 뒤집어 놓을 특유의 냄새는 제대로 된 청국장을 만들고 난 뒤에나 걱정하기로 하고 콩부터 삶았다.
삶은 콩이 든 그릇을 전기방석위에다 놓고 담요를 덮어 내 책상 바로 옆에다 두었다. 유튜브에서 콩이 발효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만 하루라고 했으니 정말 청국장이 될 지 가까이다 두고 기다려보기로 한 것이다.
드디어 24시간 후에 잘 발효했을 청국장을 기대하며 열었는데, 콩은 여태 맨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왕 시작했으니 더 기다려보자며 24시간을 더 덮어두었다가 다시 열었더니 콩들이 연한 갈색빛을 하고 숟가락으로 저어보니 실 같은 것이 약간 묻어나왔다. 가능성이 보여 다시 묻어 10시간 정도 더 기다렸다가 열어 숟가락으로 저으니 드디어 갈색빛을 한 콩들 몸에서 끈끈한 실 같은 것이 나와 콩과 콩끼리 서로 어우러지면서 냄새를 풍겼다. 청국장 뜨기까지는 58시간 정도 걸렸는데 그것이 제대로 발효할 시간인가 보았다.
날콩을 다른 성질과 향과 맛의 식품으로 만든 가장 중요한 것이 온도와 함께 시간이었다. 어둠 속에 묻힌 콩 본래의 성질을 삭혀 깊은 다른 맛을 내도록 하는 알맞은 길이의 시간. 난생처음 만들어 본 청국장을 그릇에다 옮겨 담으며 발효의 시간에 대해 생각을 했다.
어느 작품이든 초고를 마치면 나는 늘 한 동안 덮어둔다. 덮어 두었어도 머릿속에는 이야기가 따라다니므로 작품을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다. 눈에서는 멀리하되 머릿속에다 두고 생각만 하는 것이다. 눈에서 떠나있는 동안 작품이 생각과 어우러져 잘 삭도록 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그렇게 한동안 덮어 두었다가 퇴고를 위해 다시 펼치면 그 속에 빠져 있었을 때 놓친 단어나 허술한 문장이 다투어 눈에 들어온다. 시간 속에서 삭은 초고의 미숙한 군더더기를 정신의 여과기로 걸러내면 짜임새를 갖춘 문장과 이야기가 남게 되는 것이다.
알맞은 온도 속에서 콩이 발효하여 청국장이 되기까지, 설익은 초고의 작품이 발효되어 하나의 소설로 완성되기까지, 그러니까 하나의 성질이 다른 성질로 변화하는데 필요한 것 중의 중요한 하나가 시간이었다.
그런데, 사노라니 시간을 들여도 쉬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배우고 생각하고 다듬으며 정성 들이기를 평생 하는 그것, 바로 사람의 성정을 바꾸는 일이다.
나의 경우, 갓 잡아 올린 물고기 같은 성정 하나를 삭이는 일에 예순 해도 모자랐다. 여태 삭지 못하고 데굴데굴 구르며 좌충우돌하는 이것 잡으려 아침마다 결심하고 해 바뀔 때마다 아이 같은 다짐을 한다, 삶은 콩을 묻어두고 초고를 덮어두듯, 불쑥불쑥 터져 나오려는 말은 꾹 눌러 묻어두고 발끈발끈한 성질은 덮어 두자고.
결심과 다짐으로 다시 새해를 맞았다.
내 속의 성정 하나 다스리는 일에는 예순 해도 모자랐으나 이토록 긴 시간을 보내면서 얻은 것은 하나 있다. 남이 나 같을 때, 자신에게 휘둘리는 그를 통해 날 보는 것이다.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남의 잘못을 통해 날 보는 일이란.
예순의 끝자락을 밟고도 날 다스리지 못했으니 나는 아무래도 먼 훗날, 아흔쯤 되었을 때나 바뀌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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