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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동거 중
소설가 김외숙
- 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editorial@koreatimes.net)
- Mar 10 2022 09:27 AM
‘동거’란 말은 한 집에 누구와 함께 산다는 의미다.
나는 요즘 동거 중이다, 서울서 온 아들 식구와. 지난 해 12월 중순부터 올 한 해 동안 아들 내외와 두 아이들과의 동거다.
아들내외는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는데, 법이 정한 연령의 자녀를 둔 부모는 한 해 동안 육아휴직을 할 수 있다는 육아휴직 제도를 이용해 지난 12월 중순에 서울서 왔다.
스무 해 쯤 전에 내가 처음 이 땅에 왔을 때 아들과의 안부의 통로는 주로 국제 전화카드를 이용한 통화나 이 메일이 전부였다. 그 동안 세월이 흐르면서 안부를 주고받는 방법도 진화하여 요즘은 카톡으로 문자와 화상통화를 겸한 방법을 주로 쓰는데 나처럼 가족을 고국에 둔 사람에게 통신기기의 발전은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수많은 국제 전화카드를 샀고 수많은 문자를 주고받다가 그것도 모자라 한 해 한 번씩 방문하다가 마침내 자식과 한 해를 함께 사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내가 고국에 살았을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던, 맞벌이 부부, 그리고 자녀들을 위한 그 제도가 생겼음을 알고 나는 환호했다, ‘우리나라, 좋은 나라!’하면서.
아들 식구 맞을 준비를 하며 나는 동거 중에 행여 맞닥뜨릴 수 있는 다 방면의 어떤 상황을 미리 생각해야 했다. 고요히 사는 일에 적응된 나와 내 짝이 만날 어떤 상황, 그리고 저들끼리 편케 사는 일에 적응된 아들 네 식구가 낯선 땅, 낯선 환경에서 살면서 만날 어떤 상황, 무엇보다도 시 엄마와 한 해를 살아야 하는 며느리의 입장을 나는 미리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입만 다물면 돼.’
최근에 두 자녀를 데리고 온 딸과 3개월을 함께 산 적 있는 친구가 한 충고였다. 살면서 좋은 관계를 원한다면 아들 식구에게 잔소리는 절대로 하지 말라는 의미의 말이었다.
아이들이 도착하기 전, 의무적으로 격리를 해야 하는 아이들에게 집을 주고 내 짝과 나는 근처의 호텔에서 지내기 위해 예약을 하러 갔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 집에서 온전한 격리를 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2주간이란 장기투숙에 의혹을 품은 호텔 측에서 외국에서 올 장거리 여행자를 가족으로 둔 투숙객은 받을 수 없다며 거절해 나는 호텔에서의 격리를 할 수도 없었다.
드디어 지난 해 12월 중순에 네 식구가 도착해 집에서 2주간 격리와 함께 우리의 동거는 시작되었다.
깊어가는 겨울에 낯선 땅에 온 네 식구는 격리를 이유로 집 바깥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나마 바깥에 나갈 수 있던 나는 여섯 식구가 먹을 식품을 사다 날라야 했고 먼 길을 날아온 네 식구는 특히 백신을 접종하지 않은 아이들 때문에 갇혀 있어야 했다.
동거 첫날부터 맞닥뜨린 격리, 이 낯선 방법을 어떻게 현실에 적용해야할지 우리 식구 아무도 몰랐다.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집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것 외에 집안에서의 완전한 격리는 거의 불가능했다. 3년 만에 만난 우리는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이미 서로 부둥켜안고 재회의 감격을 나눈 터였고, 같은 테이블에서 마주보며 기나긴 이야기를 나눈 터였고, 먼 길 온 아이들과 식탁을 나눈 터였다. 이처럼 이미 격리의 룰을 깨고 시작한 동거였으므로 감염의 확률은 거의 확실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다만 허약한 내 짝이 행여 긴 여행에 묻어왔을지도 모르는 바이러스가 옮아갈까봐 극도로 긴장했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후부터 손자가 열이 나면서 내 짝을 제외한 식구 모두에게 바로 전파되어 특히 목감기 같은 증세를 앓기 시작했다. 다행히 내 짝은 그 어떤 증세도 보이지 않았고 식구들도 며칠 앓다가 격리기간 동안 모두 모든 증세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우리는 격리에서도 해방되었다. 우리는 모두 감기약만 복용하고 레몬차와 생강차를 많이 마셨다.
감기약으로 해방될 수 있던 그 증세를 한꺼번에 앓은 우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것이 정말 코로나 증세였을까, 또는 오미크론 증세였을까, 하면서. 그것은 그리 심하지 않은 목감기 같았는데 때가 때인지라 갇혀서 앓는다는 심리적 위축과 긴장이 오히려 증세보다 무서웠다.
오래 벼르고 벼르다가 하필 코로나에다 오미크론까지 판치는 이 난국에 먼 길 날아온 아들 식구와 격리로 시작한 동거는 이제 석 달 째 맞았다. 눈에서 멀다보니 북한에서 미사일 어쩌고 하는 뉴스만 들어도 마음 졸이다가, 밤낮 그리워하다가 이제 정말 내 아들 네 식구가 눈앞에 있으니 꿈만 같다.
동거를 하면서 엄마이면서도 내가 내 식구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내 아들이 그렇게 요리를 잘 하고 아이들과 잘 노는 아빠인 줄을 몰랐고, 며느리가 도란도란 시 엄마인 나와 얘기 나누기를 좋아하는 줄을 몰랐다. 손자가 피아노를 잘 연주하는 줄을 몰랐고 아홉 살 손녀가 무엇이든 만들기를 좋아하고 글도 잘 쓰는 문학소녀인 줄을 몰랐다. 그리고 두 남매가 수시로 장난하며 까르르 웃다가 금방 다시는 안 볼 듯이 싸우고, 말에 야무진 동생에게 열두 살 오빠가 늘 지더라는 사실도 동거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우리의 동거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아주 순조롭다. 첫날부터 지금까지 금기어처럼 속에다 가둬두고 있는 잔소리를 한 해 동안 내가 잘 다스린다면, 그야말로 내 인생에 경험해 본 적 없는, 환상적인 동거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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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editorial@koreatime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