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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김인숙(리치먼드힐·문협회원)
- 캐나다 한국일보 (editorial@koreatimes.net)
- Mar 28 2022 09:33 AM
90이 많이 넘으신 엄마가 온종일 안절부절못하신다. 오늘 당신의 부모님들이 오시는 날이라 하셨다. 빨리 가서 모셔와야 한다고 하시다, 부모님이 기다리는 곳에 화장실이 없어서 걱정이라고도 하셨다. 짧은 행동에 보는 사람의 마음을 슬픔과 애절함으로 채우는 일들이 있다. 연로하신 엄마는 자식들의 도움을 받으며 늘 평온하게 지내시는데 오늘 무슨 연유인지 안 하던 행동을 하신다.
내가 아는 엄마의 평범한 삶속 저 바닥에 있던 상처가 갑자기 다시 피를 흘리며 눈앞에 보이는 듯한 느낌이다. 삶이란 여정 속에서 수많은 생채기가 생기겠지만 그중에는 끝까지 아물지 않는 상처들이 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엄마의 그 상처는 한 자리에 머물지 못하고, 삶과 동행하며 형태와 강도가 바뀌어 갔었다. 어린 자식들을 키울 때는 너무도 생경한 아픔이었지만 생활의 소용돌이 속에서 표현도 못하고, 그냥 얼굴의 어두운 그림자로 남아있었다.
캐나다 이주 후, 적십자사를 통해 이북의 가족들을 찾던 시간에는 작은 희망의 불씨를 품은 숙제가 되기도 하면서 오늘날까지 엄마 삶의 일부로 공존했다.
지난 며칠 머릿속을 맴도는 한 장면이 있다. 러시아의 침략을 받은 우크라이나의 상황을 보도하는 TV 뉴스에 뜬 영상이었다. 3, 4세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 앞에, 젊은 아빠가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고 앉아 무엇인가 설명하고 있었다. 아이는 추운 계절에 맞는 따뜻하고 귀여운 옷차림으로 작은 가방을 등에 메고, 한 손엔 늘 침대에서 같이 잠들었을 것으로 보이는 곰 인형 하나를 안고 있었다. 나이에 맞지 않게 아빠가 하는 말을 경청하는 얼굴이었다. 아빠도 감정을 누르고 자신의 모든것을 아이를 향한 눈빛에 담은 듯한 모습이 경건해 보이기까지 했다.
세상 모든 사람은 그 젊은 가족이 만들어낸 그림 같은 장면의 처절한 무게를 알고 있다. 또 수많은 우크라이나 아빠들이 이렇게 이별을 고하고 있다는 사실도 듣고 있다. 천진하고 예쁜 어린 딸과 비장한 각오로 전쟁터를 택한 아빠에게는 다시는 그 전날로 돌아갈 수 없는 순간이다. 이제 이 두 사람이 품고 가야 할 아픔의 크기와 길이는 본인들도 우리들도 추측 할 수 없다.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의 계획이 의미가 없는 삶의 시점에 도달한 엄마는 오늘 갑자기 그 상처가 시작된 시간으로 돌아갔다. 엄마의 표정에는 원망이나, 분노, 그리움조차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마치 꿈속에서 전개되는 한 장면 속에 있는 사람처럼 그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며 하루를 서성이신다.
매일 보도되는 뉴스 속 피난민의 행렬을 보며, 아빠와 헤어진 그 어린아이를 머릿속에서 떨쳐 낼 수가 없다. 지하철 정류장에서 밤을 지새우는 아이들 속에 있을 것 같기도 하고, 폴란드 국경을 넘어가는 행렬 속에 아장아장 걷고 있을 것만 같다.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내 마음은 보이지 않는 그 아이를 따라 헤맬 것이다. 제발, 평생 이어지는 상처로 남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김인숙(리치먼드힐·문협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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