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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이름 바꾼 터키(Turkey)를 보면서
권천학 시인·한국시조진흥회부이사장
- 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editorial@koreatimes.net)
- Jun 07 2022 12:22 PM
작년 12월, 터키 정부가 그동안 사용해오던 터키(Turkey)라는 나라이름을 튀르키예(Türkiye)로 변경할 계획을 발표한 이후, 22년 6월 4일 드디어 UN의 승인을 받았다. ‘용감한’이라는 어원에 뿌리를 둔 튀르키예(Türkiye)는 ‘튀르크인의 땅’이라고 한다. 원래 터키를 터키식으로 발음하면 ‘튀르키예’인데, 영어가 주도권을 잡고 있는 글로벌 시대여서 영어식 발음으로 ‘터키’가 되었다고 하니, 옛 이름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TRT월드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UN의 승인을 받은 후 에르도안 대통령은 “튀르키예는 우리나라의 문화와 문명, 가치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므로 앞으로 국가 기관의 공식 서신 교환 시 국명을 튀르키예로 통일해 사용하라”고 지시했다는 뉴스를 접하며, 그동안 부활절의식에 사용하는 칠면조를 떠올리게 하는 나라이름이 국민적 스트레스였겠구나 하는 짐작도 되었다. 1980년대에도 국호 변경을 시도한 적이 있는데 이루지 못했던 전력이 있는데다, '칠면조' 외에도 '겁쟁이', '실패자' 등의 뜻이 있는 터키(Turkey)보다는 나은 이름이라서 국민들이 모두 좋아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뭔가 심상찮은 낌새가 보였다.
그들에겐 ‘튀르키’가 낯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옛 이름을 회복하는 의미도 있으니, 좋아할 법한데, 새 이름을 거부하고 계속해서 터키라는 이름을 쓰겠다는 국민들이 많아서 새 이름으로 굳어지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것을 보면 뭔가 심상찮은 낌새와 함께 이상한 궁금증이 생겼다.
그 이상한 궁금증을 설명이라고 하듯, 이번 터키의 개명에 대한 외신들의 평가와 분석이 분분하다. ‘터키 정부가 보수 성향 유권자들을 향한 호소에 나선 것’이라던가, ‘이번 국호 변경은 시급한 국내 문제를 해결할 대책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국민의 시야를 바깥으로 돌리기 위해 내놓은 포퓰리즘 정책’이라는 분석이 나왔고, 게다가 CNN조차도 ‘재선에 도전해야 하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보수층의 애국심을 자극하기 위해 국호 변경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었다’는 분석을 전하고 있다. 이쯤 되고 보면 나라이름을 바꾸는 일에 대하여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왜 그럴까? 이유는 국민들의 여망이 어딘가에 잘못 이용되고 있음이었다.
알고보니 위에 언급한 각종 매체의 분석과 평가에서 나타나듯이 이번에 국호를 개명하는 행위가 순수한 의도에서가 아니라 정치적 계산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국가의 개명행위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고 있음을 국민들이 알아챈 것이다.
아무리 좋게 보이는 행위라 해도 특정집단의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거나 특정인의 꼼수가 깃들어있다면 달가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분열의 원인이 되고 만다.
마치 코비드-19가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다는 일각의 주장과 같다. 질병 그 자체로서가 아닌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꼼수로 이용되어 불필요한 자유제한과 필요이상의 공포심을 유발시키고 그로 인하여 우왕좌왕을 겪었다는 것을 이제 알만 한 사람들은 다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국민적 여망이었던 일조차 달갑지 않은 터키국민들의 심정이 얼마나 심란할까.
매사 순수하지 못하면 본질에서 어긋날 뿐만 아니라 달갑지 않다. 터키국민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그렇다. 당사국의 내정문제이므로 왈가왈부 할 수 없지만, 바로 그 점에서 남의 나라 이름 바꾸는 일이 그냥 지나쳐지지 않는다.
국가든 단체든, 우리 주변에서도 그와 비슷한 일들은 종종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눈앞에 보이는 개인적인 욕심에 마음까지 멀어 밀어붙이며 달콤해 보이는 공작을 꾀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알면서도 거기에 달려있는 자신의 소소한 이(利)와 불리(不利)에 따라 저어하는 모습도 우리는 혼히 본다.
링컨은 “많은 사람을 잠시 속 일 수는 있다. 소수의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고 했다.
얼핏 겉으론 그럴듯해 보이지만 내면에 숨어있는 획책은 누구보다도 획책하는 그 자신이 가장 잘 안다. 그런 일을 저지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주체하는 한 사람이나 한 집단이 깨어나면 될 일인데 쉽지 않다. 그런 일에까지 용기가 필요한 세상인가 하는 생각에 측은지심(惻隱之心)과 함께 한없는 자괴감이 밀려올 뿐이다.
권천학 시인·한국시조진흥회부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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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한국일보 편집팀 (editorial@koreatimes.net)